평론
안드레이 루블료프 (1966)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멋있는막국수
2026-03-21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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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라는 러시아의 화가를 비추는 이 영화는 분명 전기 영화이지만 자전적인 성격 또한 없지 않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같은 고뇌를 겪었기 때문인 것일까. 종교적 색채가 뚜렷한 이 영화는 분명히 숭고하고 거룩하지만 현실과 이질적이지 않아 보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시간의 각인>에서 우리의 동시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안드레이 루블료프라는 인물을 통해 예술 창작의 심리 문제를 탐구하고 싶었으며, 초시간적 의미가 있는 정신적 보고를 창조한 한 예술가의 정신과 시민적 감정을 분석해보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과 어딘가 겹쳐 보이는 한 위대한 화가에 매료된 것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한 전기 영화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제작하게 된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는 크게 1부,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서막을 포함해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서막, 광대 (1400년), 희랍인 테오파네스 (1405년), 안드레이의 고뇌 (1406년), 이교도 축제일 (1408년), 최후의 심판 (1408년)으로 이루어진 전반부 1시간 25분의 분량이 1부, 침입 (1408년), 침묵 (1412년), 종 (1423년)으로 이루어진 후반부 1시간 38분의 분량이 2부이다. 1부에서는 전반적으로 안드레이의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된 고뇌를 그렸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외부 세계의 혼란이 개입하며 안드레이가 무너지고 최후에 다시 재기하는 과정을 그렸다.

서막은 이러하다. 예핌이라는 한 남자가 열기구와 같은 비행 장치에 매달려 하늘을 날다가 결국 추락하고 만다. 본 내용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단순한 프롤로그는 안드레이가 겪을 고뇌를 하나의 시퀀스에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장면은 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말을 한다. 맥락에 따라 도약을 상징하기도 하고, 신에게 다가가려는 인간을 상징하기도 하며, 반대로 신에게 도전하려는 인간을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예핌의 비행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한 그의 추락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신에게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비행이었든, 신에게 반하기 위한 비행이었든, 종교적인 의미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국 예핌은 이카로스처럼 추락하고 만다. 신에게 반하는 사람들을 향한 탄압으로 보이기도, 신앙의 좌절로 보이기도 하는 예핌의 추락은 어느 쪽이든 안드레이의 고뇌와 연관이 있을 것임은 확실하다.

영화는 간혹 키릴의 시점에서 진행될 때가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에 대한 영화인데 키릴의 시점이라니,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키릴의 시점에서 진행될 때조차 주인공은 철저하게 안드레이 루블료프다. 키릴은 물론 훌륭한 화가다. 하지만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옆에 있기에 빛을 보지 못하고 좌절한다. 그는 신이 내린 재능 앞에서 절망하고 시샘한다. 마치 <아마데우스>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연상되기도 하는 키릴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늘의 재능을 내려받지 못한 평범한 우리는 너무도 나약한 나머지 하늘이 내려준 천재를 질투하고 헐뜯는다. 키릴은 결국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람들의 행태, 장터가 되어버린 수도원의 모습과 자신의 재능 없음을 탄식하며 출가하게 된다. 누가 감히 키릴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의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키릴이 지적한 ‘사람들의 거짓말’은 단순히 그의 심술만은 아니다. 안드레이 또한 자신의 제자 포마를 뱀에 비유하며 그의 거짓말을 지적한다. 포마는 안드레이에게 자신은 배고프면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안드레이는 그런 포마에게 육신의 허기짐보다 영혼의 갈급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실한 신자이자 예술가인 안드레이는 포마가 엇나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포마는 후에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또한 포마를 비난하지 못한다. 포마의 선택이 곧 현실이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의 축제 역시 안드레이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교도 축제 도중 안드레이는 이교도들에게 붙잡히는데, 한 나체의 여성이 다가와 그를 풀어준 것이다. 곧이어 풀려난 안드레이는 탄압당하는 이교도들을 목격한다. 나체로 축제를 즐기며 신앙심이 없는 ‘저속한’ 이교도들에게서 오히려 자비와 관용을 보고, 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오히려 무자비를 목격한 것이다.

1부의 마지막 에피소드 “최후의 심판 (1408년)”에서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안드레이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작업은 진전이 안 되고 포마를 포함한 동료들이 떠난다. 와중에 남은 동료들이 습격마저 당해버리자 안드레이는 홧김에 작업해야 할 벽을 망쳐버린다.

성서의 구절을 듣던 안드레이는 다닐에게 이교도 축제에서의 그들은 죄인이 아니며 아무 잘못이 없다고 토로한다. 그런 후 안드레이는 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서는데, 이는 마치 “광대 (1400년)”에서 비를 피하러 오두막에 들어온 안드레이, 키릴, 다닐과 달리 오두막 밖으로 나서 비를 맞은 광대가 연상된다. 키릴이 말하길 사제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광대는 마귀의 일을 한다고 한다. 사제와 광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인데, 안드레이의 모습에서 광대가 보이는 것이다. 안드레이의 내적 고뇌가 극에 달하며 1부의 막이 내린다.

2부는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외부 세계의 혼란이 개입되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타타르족과 손 잡고 같은 민족을 학살하는 러시아인들을 보며 세계에 회의를 느낄 뿐 아니라 본인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하기도 한다. 백치 소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직접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진 안드레이는 이내 테오파네스의 환영을 마주한다.

테오파네스는 과거 안드레이에게 무지한 러시아 민족을 비난하며 세상이 지옥이 될 것이라 말하였다. 이에 안드레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무지한 것이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라며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타타르족의 침략을 겪고 난 후 세태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안드레이는 자신이 과거에 부정했던 테오파네스의 말을 인정하며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인다. 테오파네스는 이를 부정하며 과거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만 큰 상심에 빠진 안드레이는 결국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유일하게 생존한 백치 소녀는 태연하게 죽은 자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다. 백치 소녀는 평생을 무지하게 살아왔다. 그녀는 죄인인가. 대학살의 현장 앞에서도 담담하게 죽은 자의 머리를 땋아줄 수 있는 그녀의 순수함을 죄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영화는 안드레이의 몰락을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곧이어 성당 안에 눈이 내리는 장면은 영화 내에서 서정성이 가장 훌륭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타타르족이 휩쓸고 간 잔해로 인해 내리는 분진을 눈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언제까지 조국에 고통이 이어질 것이냐는 안드레이의 질문에 그건 모르지만 아름답지 않냐고 대답하는 테오파네스의 대답에서 이어진다. 테오파네스의 환영은 안드레이의 내밀한 본심을 반영하는 환영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사후세계를 겪은 후 생각이 바뀐 테오파네스의 영혼이었을까. 테오파네스는 안드레이에게 천국은 없다며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세계에 회의를 느껴 좌절한 안드레이의 내면이 반영된 것일까. 혹은 반대로 그 말을 듣고 회의가 생긴 것일까. 물론 그의 신앙이 깨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안드레이는 무너졌다.

안드레이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겠노라 선언한 후 침묵 서원을 한다. 백치 소녀와 함께다. 그들 앞에 타타르족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소녀는 그들의 호의에 즐거워하며 타타르족을 따라 가려한다. 안드레이는 만류하지만 소녀는 오히려 그런 안드레이에게 화를 낸다. 그녀는 무지하기에 타타르족에게 용서 아닌 용서를 베풀 수 있었다. 용서는 예수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영화는 다시 한번 묻는다. 과연 정말 무지가 죄일까. 아무래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이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종 (1408년)”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다. 영화는 이전까지의 에피소드와는 달리 보리스라는 소년을 조명한다. 그는 대공이 주문한 종을 주조하는 총감독이 되는데, 이때 종을 주조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보리스는 자신만의 신념과 자부심으로 종 주조를 강단 있게 밀고 나간다. 하지만 그런 보리스도 완성품을 대공 앞에서 선보일 때는 소심해지고 자신감을 잃는다. 많은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을 완성하는 과정은 분명 자신감과 신념이 필요한 일이지만 때로는 주눅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본인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정부의 압력을 받았을 때나, 작품을 완성시켜 대중과 평단에 선보일 때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보란 듯이 보리스는, 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훌륭한 걸작을 세상에 선보인다.

안드레이는 그런 보리스를 보고 “성 삼위일체”를 완성시키겠다고 다짐한다. 안드레이는 보리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종이 울릴 때 화면은 종도, 보리스도 아닌 안드레이를 비춘다. 거대한 프로젝트 앞에서 도망친 안드레이 본인과는 달리 보리스라는 어린 소년은 훌륭하게 완성시킨 것이다. 안드레이가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침묵을 깨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한 소년의 열정이었다.

나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첫 관람은 노트북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영화관에서 틀어 준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설레기도 하는 마음으로 보러 간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첫 관람에서보다 더한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크리스천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다. 그럼에도 스크린에서 펼쳐진 한 예술가의 서사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시종일관 흑백 화면만을 보여주다가 컬러로 전환되며 “성 삼위일체” 이콘을 10분가량 전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통해서 예술가의 사명을 탐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안드레이 루블료프라는 한 독실한 예술가가 추락한 후 재기하는 과정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그려냈다. 자신을 안드레이와 겹쳐 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예술가의 사명을 깨닫고 고뇌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본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나를 본격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나는 감히 그를 신이 내린 영화감독이라 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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