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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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얼굴을 한 호러 <키퍼>오즈 퍼킨스의 신작 <키퍼>이다. 어쩌면 전작 <롱레그스>를 그대로 답습하는 듯 보이지만, 필자에겐 한층 더 발전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내내 쌓기만 한 반면, 이번에는 그 결과로 클라이맥스를 제대로 터트릴 줄도 아는 듯 보인다. 사실 이미 로튼 토마토도 썩었고, 국내외 관객들의 반응 역시 그닥이다. 대부분 분위기와 이미지만 그럴 듯 하다는 악평이 넘쳐난다. 그러나 서사가 뒤로 물러난 오즈 퍼킨스의 영화에는 효과적인 상징 체계가 이를 대체한다. 빽빽하게 가라앉은 호러의 분위기 속에 설명을 대신한 이미지들이 한가득이다. 마치 나는 아이디어를 던져 주는 것이 전부이며, 조립은 관객의 몫이라는 듯한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이리저리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필자에겐 이 <키퍼>는 상당히 흥미로운 영화로 보인다. 아래부터 스포일러를 포함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아래 이미지들 깜놀주의...) 'keeper'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곁에 두고 싶은 사람' 혹은 '관리자'. 놀랍게도 이 두가지 뜻으로 영화 전체가 설명된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으로는 주인공 리즈를 포함한 오프닝의 모든 여성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모두 말콤의 입장에서 keeper들이다. 이 영화 속에서는 조금 더 폭력적인 맥락으로, 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오두막에 갇힌 여성들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말콤(남성)이 아니다. 크리처들이다. 극중의 설명에 따르면, 이 크리처들은 집을 요술로 봉쇄한다고 한다. 이들은 따라서 리즈(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관리자, Keeper들이겠다. 그렇다면 이 크리처들은 누구인가? 바로 리즈의 자녀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건이 시작되기 전, 리즈와 닮은 오래 전 여성의 자녀들이겠지만.) 이러한 단순한 설정들만으로 영화는 상당히 흥미로운 해석의 층위를 제시한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주인공 리즈는 남편(남성)에 의해 소유되고 모성(자녀들)에 의해 가둬지는 것이다. 극중에 전화통화에서 친구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녀는 '너는 엄마이다'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기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꾸만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을 꾼다. 마치 리즈가 그 안에 갇혀 있을 책임이 있다는 듯, 엄마로서 모성을 잃어선 안된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이 대상은 리즈 뿐만이 아닌 모든 여성들이다. 오프닝을 포함해 극중에서는 빈번하게 여러 여성들의 울부짖는 얼굴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강가에서 강물에 비친 리즈의 얼굴은 검정색으로 특정되지 않는다.마지막에 마주한 크리처의 기괴한 얼굴에는 그녀 이전모든 여성들의 얼굴이 담겨있다. 이처럼 비극을 한 여성의 얼굴로 특정하지 않음으로, 이 이야기는 그간 억압받아온 모든 여성들에게 되돌아간다. -------------------------------------------------------------------------------이 아래에서는 흥미로운 디테일들에 대해 적어보겠다. 1. 케잌의 비밀 말콤이 말하길 오두막에는 관리자가 있는데 케잌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케잌을 한입만 먹으면 가둬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케잌을 만든 관리자(keeper)가 누구인가? 라고 한다면 바로 크리처들,자녀들이다. 리즈에게 하트를 날린 후 크리처가 남기고 간 것 역시 케잌이 든 상자다. 그러니까 이 케잌을 먹는 순간 시작되는 이 장르적인 의식은 마치, 자녀의 사랑을 먹는 순간 모성의 집에서 탈출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2. 리즈는 왜 특별할까 그녀는 오래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1년이면 결혼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친구가 장난칠 정도이다.또한 리즈는 자신이 엄마인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말콤에 대한 의심이 사랑보다 크다. 종합해보면, 그녀에겐 그동안 제물이 되어온 여성들과는 달리 사랑과 모성이 결여되어 있다. (극중에서 리즈가 말콤을 엄청나게 사랑해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리즈를 제물로 바친 말콤이 그녀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오니 말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크리처들의 공격에도 흡수되지 않은 이유 역시 비슷할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도로 크리처의 몸에 가둬진 여성들을 도로 흡수한 게 아닐까. 3. 역전된 결말 리즈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실패해, 말콤은 폭삭 늙어버린 모습이다. 이제 리즈는 역으로 말콤에게 케잌을 먹이고(남성에게 모성을 강요하고), 박제시킨다. -------------------------------------------------------------------------------마무리하며 전작 롱레그스에서 이미 증명했듯, 오즈 퍼킨스가 호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은 탁월하다. 특히 터트리진 않고 내내 참을성 있게 쌓아올리는 측면에서는 손에 꼽는 수준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키퍼는 전작 롱레그스와 달리, 상대적으로 비밀들이 드러나는 타이밍이 앞당겨졌다. 덕분에 그 이후의 긴박함이 좀 더 잘 드러나며, 클라이막스의 쾌감을 좀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거기에 아주 심플하고 효과적인 설정들과 메타포로 영화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극을 끌어나가는 방식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 서사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여전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슬로우 번 호러의 분위기 자체에서 오즈 퍼킨스의 인장이 선명하게 느껴지기에 영화 감독에게 그만한 장점도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Fridaythe13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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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두고 온 무언가중학생 때부터 전역을 한 지금까지 종종 꾸는 꿈 속의 나는 초등학생, 빨개벗고 있다. 실내화 주머니를 집에 두고 나왔다. 쪽문을 나와, 육교를 건넌다. 너무나 집에 돌아가고 싶고 부끄러운데, 발걸음은 학교로만 향한다. 나는 학교에서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문제아. 최악의 경우에는 맨발형에 처해질 수도. 지각하기도 무섭고. 실내화를 안 들고 온 나는 대역죄인, 사형집행자는 조회대에서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난다. 아리 애스터는 이런 악몽을 영화로 만들었다. 유치한 편지가 담긴 조각상. 어머니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깨진다. 절대 물 없이는 먹으면 안되는 그 알약. 물은 제때에 그 자리에 없고, 보는 또다시 미끄러진다. 보가 틀지도 않은 음악의 소리로 밤잠 설치는 이웃. 보는 맘편히 집앞 골목을 걸어다닐 수도 없다. 비행기 티켓을 놓치고,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어머니의 장례식을 놓치고, 돌아갈 집을 놓친다. 보의 욕조 위 천장에 붙어있는 불청객과의 조우는 땀에 의해, 거미에 의해 또다시 지연되고 미끄러진다. 보에게 가장 소중한 세 아들. 성관계를 해본 적도 없는 보와의 사이에서 또다시 어긋난다. 꼭 도착해야 하는 엄마의 품.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의 발길이 다른 곳을 향한다. 인연이나 만남은 또다시 지연되고, 또 한 번 미끄러진다. 중력이 약한 달에서 걷듯이,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허우적대듯이. 무언가에 잡아당겨지는 보, 밀리고 지연되는 사건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보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사건들. 끊임없이 어딘가 도달에 실패하고 들리게 되는 경유지. 제발 실내화를 가지러 집에 돌아가고 싶다. 마음 한 자리를 차지하는 어딘가에 두고 온 무언가의 먹먹함. 영화 내내 그 먹먹함이 물 먹은 낡은 걸레처럼 축축하고 무겁다. 나에게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현실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감정의 극단은 나에겐 마치 청양고추 먹는 일처럼 즐겁다. 오늘 밤에도 영화가 맡을 수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그 역할들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생각해본다.주나힘주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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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라는 공간 앞의 무력감 <백룸>백룸 원작자, 케인 파슨스의 감독 데뷔작 '백룸' 이다. 작년의 '8번 출구'에서 장르적으로 부족한 재미에도 게임의 공간과 규칙을 영화적으로 적용해나가는 방식이 상당히 인상깊었는데, 이 '백룸'은 그 양쪽을 모두 잡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원작자가 감독이다 보니 공간을 연출하는 방식 자체도 상당히 흥미로우며, 가장 미니멀한 설정으로 거대한 은유를 담아내는 영화적인 방식도 탁월하다. 더불어 공포감을 형성하는 방식은 점프스케어 보다는 상대적으로 슬로우 번 호러에 해당하는 영화인데, 시종 스멀스멀 음산한 기운이 맴돌던 '롱레그스'의 감독 오즈 퍼킨스가 멘토로 참여한 흔적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래 스포일러 다수 포함)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밝혀지듯이 이 공간을 연구하는 단체는 본래 MRI 개발 회사였다고 한다. 왜 하필 MRI인가, 한다면 이 '백룸'이라는 공간 자체가 일종의 뇌, 정신으로서 은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 근처의 인간 팻말을 미끼로 깊숙한 곳에 거주하는 괴물을 끌어내는 그들의 행동은 정신 깊숙이 숨겨진 것들을 알아내려는 노력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내면 깊숙한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이러한 노력은 계속해서 좌절된다. 백룸 속의 경험은 백룸 밖에서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은 메리→클락, 연구자들→메리 이렇게 두 번 반복된다. 메리는 상담가이며, 클락의 꿈이 건축가라는 사실 역시 이 구도에서 중요한 포인트이다. 마치 개인 각자 내면을 설계하는 건축가이며, 타인은 그에 닿으려 노력하는 상담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기 내용을 바탕으로 디테일로 들어가보겠다. 클락의 상점 이름은 ‘클락 선장과 오스만 제국’이다. 그는 홍보를 위해 후크 선장처럼 분장을 하고 광고를 찍지만 어째 모양새가 안 난다. 겉으로는 선장을 자처하지만 사실 진짜 선장은 그의 내면의 창 깊숙한 곳에, 백룸 속에 살고 있는 괴물이다. ( 괴물은 그가 광고에서 입었던 선장 착장을 그대로 입고 있으며, 메리가 발견한 벽화에서는 선장 모자를 쓴 괴물이 클락을 조종하고 있다.) 백룸 속의 테이블 장면에서 메리는 클락에게 변할 필요가 없다면서 포기선언을 한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나 그를 잡아먹는다. 자신마저 포기한 상태에서 외부의 노력마저 좌절되는 순간, 그는 축축한 내면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클락이 잡아먹히기 전까지는 누구나 이 영화가 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메리의 것에 가깝다. 극중에서 중간중간 삽입되는 회상 장면 역시 오직 메리의 과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인(메리)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조잡한 역할극이 전부이다. 여기까지 메리→ 클락의 상담은 실패로 끝이 난다. 메리의 포기 선언과 함께 타인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깨닫는다. 이후 도망치던 메리는 위기의 순간에 주머니에 있던 돌로 괴물을 내리침으로 탈출한다. 그녀의 트라우마를 담은 그 돌은 부서진다. 백룸 밖으로 나와서 의사들은 그녀에게 백룸 경험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여기서 연구자→메리의 상담이 시작된다. 마치 메리가 클락에게 요청했듯 말이다. 관객과 메리는 앞서 클락의 상담을 통해 이미 깨달았겠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치유할 수는 없다. 영화 마지막에는 백룸의 어떤 구역을 비추는데, 현재 메리의 집과 어릴적 집이 철거당한 장소 등이 그대로가 옮겨져있다. ‘모든 곳의, 모든 과거의 기억으로 가득찬 방’이라고 설명된 백룸이기에, 추측컨대 이 곳은 그녀의 기억과 관련된 구역일테다. 또한 클락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왜곡된 이유는 아마도 새로 생성된 기억이기 때문이겠다. 오프닝에서 철거된 어릴 적 집과, 그녀가 직접 깨뜨린 마지막 돌 조각까지 관객 입장에서는 그녀가 트라우마를 완전히 허물어낸듯 보이지만 깊숙이 묻어놓은 것일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비춰진 메리를 닮은 엔티티처럼, 그 기억 속 중심에는 여전히 왜곡되어 침전된 자아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시나 외부의 노력은 그에 온전히 닿을 수 없는 것이다.Fridaythe13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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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영화의 힘이상한 사람끼리~ 함께 이상할 것~ 명절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서 영화나 음악 얘기가 나와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처음 만난 호감 가는 이성과 취향을 주고받을 때에도 못 본 척 숨겨둘 수밖에 없는. 실시간 검색어 1위 / 인기 차트 1위 / 장안의 화제 / 저잣거리 풍문 근처로도 가볼 수 없는. 그런 퀴퀴하고 축축한 영화나 음악이 품은 사랑. 그리고 그 늪에 끌어당겨지는 특정 계층 인간. 나는 왜 이상한 것을 사랑하는가. 퍼스널 쇼퍼가 왜 나를 끌어당기는지는 모른다. 내가 왜 퍼스널 쇼퍼를 사랑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시종일관 말을 하다 마는 화법.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해야 할 때 블랙아웃. 갑자기 영화를 마무리하며 화이트아웃. 고집이나 변덕이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굳이 날지 않고 그저 본인의 길을 고고하게 걸어가는 큰 새의 걸음걸이로 이야기를 밟아나간다. 영화에서 인스타 라방 댓글식 애니메이션 편집이 실사 화면에 겹쳐 올라오거나, 채팅 애니메이션이 띵띵 떠오르면서 후시녹음 더빙이 들어오는 텍스트 처리가 나오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헤어질 결심은 예외) 그렇게 레토르트 음식을 전자렌지에 뎁혀주는 영화에게 푸대접을 당하고 살 수 없다. 퍼스널쇼퍼, 헤어질결심, 해상화의 시설과 종업원은 무뚝뚝할 수 있지만 최고의 위생 상태, 최고급 식기류, 묵묵하면서도 세심한 손님맞이로 관객을 극진히 대접한다. 퍼스널 쇼퍼는 텍스트를 전달하기 위해 그저 폰을 보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손을 가까이서 잡아줄 뿐이다. 그 결과 문자 메시지를 읽는 동시에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무얼 보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을 읽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마음에 들어가면서, 다음 채팅을 기다리고, 읽씹하기도 하다가, 데이터가 켜지면 밀린 문자가 한번에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고, 작성중 ···에 애태우기도 하며, 크리스틴 스튜어트 손에 들린 폰이 진정한 시네마 배달부 빗자루가 되는 것이다. 날아다니는 컵이 어떻게 이 정도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냐··· 열리고 닫히는 자동문을 이 정도로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던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죽이고 싶다는 말인 것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울. 아무것도 보여주고 있지 않은 거울. 텅빈 거울 속을 굳이 비추는 눈빛은··· 꽃말을 읽지 말고 꽃을 보아라. 나는 왜 이 영화를 이렇게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블랙홀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침묵하는 이상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유 없이 시꺼먼 이상한 구멍의 마력. 역겨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그 자성. 그것이 이상한 영화의 힘이다.주나힘주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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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친구(2025) - 일디코 엔예디근래 개봉한 서정적인 영화들 중에 이 정도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이 있었던가. 영화는 독특한 시점샷을 통해 식물에게 일종의 인격을 부여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관계에 있어 이를 고독에 관한 커다란 비유로 담아낸다. 특히 소재 자체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는 서사와 그 비유가 제대로 맞물리며 도달한 결말은 꽤 복합적인 인상을 남긴다. (아래부터는 영화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다.) 싹이 트는 오프닝과 열매를 맺는 엔딩까지, 영화는 마치 은행나무의 일대기를 보는 것만 같다. 각각 1908년, 1972년, 2020년에 사는 세 명의 주인공과 함께 은행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서 이들의 역사를 함께한다. 영화 초반부에 언급되는 바로는, 사람 뇌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의식 방법이 있다고 한다. '스포트라이트 의식'과 '랜턴 의식'이다. 전자는 관심을 가지는 대상을 제한하며 나머지를 지워버리는 방식이며, 후자는 관심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최대한 전체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보통의 성인들은 스포트라이트 의식을, 아기와 식물은 랜턴 의식을 사용한다. 각 시대의 인물들 역시 스포트라이트 의식을 사용한다. 1908년 최초의 여자 대학생인 그레테는 대학교에서 식물학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는 것에, 1972년 숫기 없는 대학생 하네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2020년 뇌과학 박사 토니는 뇌과학과 식물 연구에 혈안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듯 행동하며,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탓에 매우 고독해 보인다. 재밌는 점은, 이들 모두 모종의 사건을 겪고 반강제적으로 랜턴 의식을 택하게 된다. 그레테는 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로 생긴 오해로 집에서 쫓겨난 후 사진 기사 조수로 일하며,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하네스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와 식물과 교감하며, 토니는 코로나로 인해 중단된 뇌 연구 대신 주변 식물을 연구하며, 총장에 의해 중간에 연구가 중단된 후에는 총장에게도 관심을 할애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전부라 생각하던 영역 바깥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만으로 고독이 어느 정도 누그러질 수 있다고 한다. 혼자 묵묵히 사진 공부를 하여 인도네시아 답사에 참여함으로 다시 연결되는 그레테처럼, 식물과 교감하며 기다린 끝에 군둘라의 제대로 된 고백을 받은 하네스처럼, 총장과 친구가 되고 숫나무의 정자를 받아 직접 수정시킴으로 암나무와 연결되는 토니처럼 말이다. (솔직히 이 귀결이 조금은 급작스럽게 느껴지긴 하나, 필자는 영화적 허용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목에 나와있듯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말'이 아닌 '침묵'이다. 각 시대에서 인물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 즉 말(언어)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는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 식물원에 있었다고 말한 그레테는 오해로 쫓겨나며, 숫총각이냐며 어긋나게 전달된 군둘라의 관심에 하네스는 화를 내며 입을 다물어버린다. 연구를 포함해 태극권 같은 이상한 행동까지 보이는 박사와 총장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조교를 통해 전달받은 말 한마디는 분란을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이 오해들은 말로서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하는 편을 택한다. 마치 식물처럼 말이다. (그레테는 해명하지 않으며, 하네스는 더 대화하기보다 홀로 남기를 택한다. 밥을 먹을때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해도 되겠냐는 토니의 질문에 총장은 밥이 식는다며 간접적으로 거절한다.) 그들의 교류에는 침묵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마치 사회가 요구하는 침묵, 혹은 숫기 없는 성격으로 인한 침묵, 언어의 차이로 인한 침묵, 자연의 침묵,등등 이러한 수많은 (손쉽게 통역되지 않는 것들)침묵들 속에서 고독한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교류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영화 말미에 그레테가 자신의 신체를 찍은 사진들이 보여지는데, 이는 마치 꽃잎을 찍어놓은 듯 보인다. '자연'이라고 하면 주변의 것들만을 떠올리겠지만, 우리도 그 커다란 생태계 속 하나의 개체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롱 샷, 딥 포커스로 보여주는 풍경 속의 인물은 이토록 자그맣고 고독해보이면서도, 커다란 세계 속의 분명한 일부이다. 어쩌면 세계를 제한하지 않는 그런 인식으로 행동한다면 이 고독은 누그러지며, 더 나아가 안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운이 좋다면, 누군가 나의 침묵에도 관심을 가져준다면, 고독은 해소될지도 모르겠다. 이리도 묵묵히 버텨내 열매를 맺은 은행나무처럼 말이다.Fridaythe13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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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영화는 끝나지 않아야 한다여운같은 게 아니다. 영화 감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천장에서 영화가 계속 상영되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장점으로는 영화가 완벽해질 수가 없다. 영화가 끝나지를 않아야 한다. 영화의 몸에 자기 혼자 숨이 붙어 생명체이자 유기체가 되어 스스로 굴러가야 한다. 인사이드 르윈은 얘기해주거나 들려주거나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 졸음운전을 할 때는, 내 뇌에 잠을 2시간 자고 출근한 나의 고통이 그대로 리콜되어 저장된다. 뇌가 20키로 플레이트에 꾸욱 눌리는 그 고통.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그 고통. 르윈 데이비스는, 낙태를 약속했던 전 애인이 아이를 지우지 않은 채 둘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둘이 살고 있다는 곳을 지나친다. 여지없이 망한 오디션에서 도망치고 동사의 위기를 벗어나 차를 겨우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르윈 데이비스는 그곳의 표지판을 응시한다. 차를 돌려 그 아이를 찾아가볼지 말지 고민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논리와 언어는 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주는 감흥 뒤에 딸려오는 덤일 뿐이다. 코엔 형제가 주사기로 내 뇌에 찌르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내 장기로 흘러들어온다. 내가 시작한 짓거리들을 그냥 싸그리 다 멈추고 0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고통. 그냥 죽고 싶은 느낌.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은 계속 망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다. stories live forever, people don't. - 카우보이의 노래 인사이드 르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영화의 단점을 찾을 수가 없다. 완벽한 영화다. ” 왜 그리들 말하는지, 그 진짜 이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발이 다 시리다. 지금 르윈 데이비스는 살아있다. 루 n. 데이비스로 오해받으며, 아직도 꾸준히 망하며, 아직도 꾸준히 얻어맞고 있다. 그는 또 잃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절대 사그라들지 않는다. 영화의 생명의 불을 꺼트릴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무슨 추위가 닥쳐와도 끝날 생각이 없다. 조용히 하는 법을 모른다. 노래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 1절 , 2절, 클립, 싸비 하이라이트, 그런 건 없다. 삶은 원래 멈추거나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끝났으면 하는데도, 그만 망했으면 하는데도, 원래 삶은 끝나지가 않고, 인간은 망하는 일을 도통 멈추지를 않는다. 그걸 생각하니 또 손끝이 시려온다. 손끝을 그냥 잘라내는 게 낫겠다 싶은 고통. 완벽한 영화다.주나힘주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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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일본도를 들고 타는 세계그런 세계는 없다. 누군가가 창조하기 전까지. 예술은 개인의 감정이다. 예술은 나의 세계를 남에게 설득시키는 일이 아니다. 나의 세계를 창조한 뒤, 전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타란티노는 중력의 말을 들을 생각이나, 문법을 지켜 예쁨받을 생각이 없다. 우마 서먼이 핫토리 한조의 검을 받아들고 도쿄로 향하는 길에, 비행기 한 켠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도 보관함이 보인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가.. 하는 착각을 느끼고서는 뭔가 멋진 말이라도 주워섬길 준비를 하거나, 되묻기라도 하려는듯, 혹은 쏘아붙이려는듯이 입술을 움찔거린다. 그 비행기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파이 메이는 비단결 흰수염을 몇번이고 살랑살랑 굳이 휘날리며 키도의 칼 위에 손쉽게 올라탄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치명적 살상 무기가 샛노란 이소룡 트레이닝 자켓을 입고 오토바이를 탄 채 일본 시내를 누빈다. 캘리포니아 마운틴 스네이크가 트레일러 문을 열면 블랙 맘바의 두 발이 카메라와 함께 하늘을 가르고 그녀의 가슴팍에 날아가 꽂힌다. 조니 모가 양손에 칼과 칼집을 들고 벽을 타고 올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에게 덤빈다. 70년대의 3류 액션영화, 그 당시를 주름잡던 액션 배우, 그냥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에 나온 배우를 섞는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타란티노는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이 재밌다. 원래 창작은 재밌고 좋은 것이다. 당신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계는 흔들리거나 삐지지 않는다. 당신을 기다리거나 당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는다. 허나 당신이 새로운 세계 하나를 손에 넣고 싶다면, 이 시뻘건 세상은 언제든지 당신의 것이 될 준비를 진작에 마치고 그 자리에 서있다. 텁텁한 앙금 하나 없이. 쿨하게.주나힘주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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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셰트(1967) - 로베르 브레송 (1)영화는 어떤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가슴 위에 돌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그녀는 죽음 자체보다 남겨질 이의 삶에 대한 걱정이 더 커보인다. 이후 배경이 숲으로 바뀐다. 한 사냥꾼이 올가미를 설치한다.이에 걸려들어 몸부림을 치는 꿩의 모습과, 수풀에서 이를 몰래 지켜보는 산림감시원 마티유의 시선이 교차되어 제시된다. 어째 그는 꿩의 죽음을 기다리는 건지, 바로 풀어주지 않는다. 기다려도 죽지 않고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꿩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제야 다가서서 풀어준다. 이 오프닝의 사냥장면은 이후 반복된다. 태풍이 부는날 아르센에게 붙잡힌 무셰트의 상황과 같다. 다만 이번에는 지켜보는 시선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아르센은 수풀에 숨어 비를 피하던 그녀에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고백하며 말을 맞추자며 협박한다.그가 잠시 자신의 범행 현장으로 돌아가고 이내 숲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아르센의 총은 그곳에 있다. 그럼 누구의 총소리인가? 돌아온 그는 아마도 죽지 않은 마티유의 총소리이며 그가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 하며, 그녀와 함께 오두막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분명 앞선 장면에서 마티유와 아르센은 다투다 화해를 했다. 그럼에도 정보를 완전하게 주어주지 않는 브레송 영화의 특성상 관객은 일단 아르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오두막에 도착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헤어지려다, 이내 아르센은 패닉에 빠진다. 온갖 불안에 떨며 그녀가 발설할까 문을 막기까지 한다. 그는 그러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그녀는 그를 부축한다. 그가 깨어나자 그녀는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며 약속하며 그에게 노래를 불러준다.(실제로 지킨다.)'콜럼버스는 희망을 가지라며...' 학교에서 완창하지 못했던 노래를 이번엔 끝까지 불러낸다. 희망을 믿기로 한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아르센에게 부여한 삶에 대한 희망은 그녀를 다시 위협한다. 아르센은 취한 상태로 이내 그녀를 협박하고 강간한다. 이 장면 외에도, 무셰트에게 가해지는 관심은 항상 폭력의 형태를 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서, 일상에서는 남성에게서 폭력을 당한다. 학교에선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비웃으며 배척한다. 선생님은 피아노 앞에서 대놓고 망신을 주기도 한다. 하교길에 남자 아이들은 그녀에게 바지를 내리며 성희롱을 한다. 아버지는 수시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린다. 이미지로서 이 폭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놀이동산에서 범퍼카를 타던 그녀에게 어떤 남성은 관심을 보인다. 그 관심의 정도는 차를 박는 강도에 비례한다. 점차 거세게 부딪히며 재밌어한다. 놀이기구 운행이 끝나고 그 남자를 찾아가지만, 어째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사람들에겐 그녀가 길거리에서 구애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일테다.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녀의 뺨을 때리며 그에게서 그녀를 떼어놓는다. 왜 무셰트는 이 폭력들에 대항하지 않는가?라고 했을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이들이 가하는 시선의 폭력에 그녀는 흙을 던짐으로 대항하며, 범퍼카 남자에게는 더 세게 갖다박기도 한다. 처음엔 아르센의 강간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아버지에게 '제기랄'이라며 욕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도들이 무력하게 작용하는 것 뿐이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무력하며, 전반적으로는 시선의 폭력에 눌려버린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그녀에게 점차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선의 폭력은 그녀가 아르센에게서 빠져나오자 더욱 심해진다. 마티유의 집에 찾아간 그녀는 전날 밤 아르센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지만, 그들의 추궁과 시선에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 전날 밤 강간하는 아르센을 기꺼이 끌어안는듯 한 그녀의 모습처럼, 어쩌면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외적으로는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한 카페 사장은 이내 손님과 쑥덕거리다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며, 창녀라고 비난한다. 두 경우 모두 그녀는 직접 해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 브레송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겠다.) 집으로 돌아가다 어떤 노파가 그녀를 부른다. 그녀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급하며 수의를 쥐어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죽음을 이해한다고 한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낫다는 말 같기도, 낙인이 찍힌 무셰트에게 죽음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 같아보인다.이제보니 이 수의는 무셰트 자신의 것 같다. 당혹스러움에 그녀는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 지금까지의 일을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삶으로의 탈출에 구원은 없는 듯하다. 올가미에서 탈출한 꿩에게, 오두막에서 탈출한 무셰트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유나 구원이 아닌 고통스러운 삶의 연명이다. 희망은 없다.( 그렇다고 절망은 아니다, 무셰트는 절망하기보다 조용하게 감내한다.) 어머니에게 밤 사이에 태풍이 왔다면서, 태풍 맞겠죠? 라며 말을 흐리던 무셰트 역시 이 삶의 고난이 끝나긴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이후 엔딩에서 토끼를 사냥하는 여러 사냥꾼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총소리는 더 이상 특정되지 않는다. 위협은 사방에 도사린다. 그녀는 총을 맞아 발버둥치는 토끼를 본다. 오프닝의 마티유와 달리, 그녀는 토끼를 죽음을 그저 바라본다. 무셰트를 남기고 자살을 한 어머니처럼, 무셰트 역시 돌보아야 할 아기를 남기고 죽음을 택한다.( 사실 아기가 남자 아이라는 측면에서, 무셰트의 어머니보다는 남겨진 이에게 대물림 될 고난에 대한 걱정이 덜 할 것이다.) 이후 수의를 몸에 지고 언덕에서 굴러 강에서 자살을 결심한다.그러다 트랙터에서 누군가 오는 걸 보고 멈춘다. 약간은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지만 그는 그냥 지나친다. 아무리 죽음을 결심했다 한들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무셰트는 강에 다시 몸을 던진다.카메라는 물 속에 익사한 무셰트의 장면을 몇 번이고 되감는다. 수면이 조금 흔들릴 뿐, 변화는 없다. 그렇다면 무셰트는 성녀인가? 잔잔한 수면을 비추는 엔딩에 흐르는 Monteverdi의 Magnificant(마리아의 찬가)는 순교자 무셰트를 위한 것인가? 브레송이 아무리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 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다. 죽음은 구원이 아닌 죽음일 뿐, 그 순간일 뿐이다.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카메라는 더더욱 포착하지 못한다.어떤 가치 판단이나 지성이 관여된 설명 대신, 존재하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 원칙인 브레송의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어느 장면에도 무셰트에게 구원의 빛이 들지 않는 이 영화처럼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Fridaythe13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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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 데이비드 린치<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컬트 영화의 거장, 데이비드 린치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21세기 최고의 영화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작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2001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보고 21세기 영화가 시작됐다고 느꼈다고 평했다. 그런 만큼, 작년 데이비드 린치의 부고 소식은 전 세계의 수많은 시네필들에게 아주 큰 충격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당시에는 그의 작품을 하나도 관람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의 부고 소식이 다른 팬들만큼의 상실감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제야 그의 작품을 관람하고 영화계가 얼마나 큰 별을 잃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린치를 향한 추모와 감사의 의미를 담아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리뷰해보고자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난해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관에 들어갈 때 다소 긴장한 채로 들어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생각보다 그렇게 난해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괜찮다. 영화라는 예술은 원래 내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눌 수 있다. 그 기점은 당연하게도 푸른 상자를 연 시점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나뉜 두 부분은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게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이다. 1부, 즉 푸른 상자가 열리기 전까진 이야기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물론 중간중간 뜬금없다고 생각되는 장면들도 있고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한 연출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진행 방향만큼은 뚜렷하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리타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여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굵은 줄기 주변으로 뻗어있는 아리송한 장면들은 2부에서 반전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생기를 얻고 의미를 찾는다. 기이한 꿈같던 장면들로 관객들이 영화에 흥미를 갖게 하면서 그 해답을 정반대의 세계에서 찾게 만드는 영화 구성은 그야말로 감탄이 나온다. 1부를 보다 보면 여러 의문들이 생긴다. 아담의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가게 뒤편에서 갑자기 등장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기괴한 남자는 정체가 뭐지? 다이앤은 누구고 그녀는 왜 죽어 있는 거지? 1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부를 봐야 한다. 2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이앤(1부에서의 베티)은 카밀라(1부에서의 리타)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카밀라는 이런 관계를 끝내야 한다며 다이앤을 밀어낸다. 카밀라는 영화감독인 아담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녀는 일부러 다이앤 앞에서 아담과 애정행각을 하고, 그런 모습을 본 다이앤은 분노에 차게 된다. 다이앤은 한 남자(1부에서 자동차 사고를 낸 젊은이)에게 카밀라의 사진을 보여주며 모종의 의뢰를 한다. 1부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 기괴한 남자는 푸른 상자를 들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이앤은 한 노부부(1부에서 베티가 공항에서 만난 노부부)의 환영을 보고 총으로 자살한다. 자, 이제 1부에서 엉켰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다. 1부는 일종의 “꿈"이다. 다이앤의 꿈. 다이앤의 꿈에서는 절망적인 현실과는 정반대로 반전된 세계가 드러난다. 다이앤은 비록 배우 지망생이지만 오디션에서 모두의 극찬을 받는다. 자신을 배신했던 카밀라는 사고를 당하고 기억을 잃은, 즉 ‘다이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등장하며 현실에서는 실패한 사랑마저 성공하게 된다. 카밀라를 ‘뺏어간’ 아담은 외압으로 인해 여주인공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캐스팅하지도 못하고, 애인의 바람을 목격하며, 처참한 몰골로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파산했다는 소식마저 듣는 비참한 인물로 묘사된다. 당연히 꿈이기에 1부의 등장인물들은 2부에서, 즉 현실에서 등장한 인물들의 재구성이다. 집주인 코코는 아담의 어머니이고, 카우보이는 파티에서 목격한 인물인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뒤죽박죽이다. 다이앤은 현실에서의 가게 종업원의 이름인 베티가 되고, 카밀라라는 이름은 아담이 억지로 캐스팅해야 하는 여배우의 이름이 된다. 그렇게 꿈을 살아가던 베티와 리타에게 현실이 점점 다가온다. 분명 현실에서 죽은 다이앤의 시체를 꿈에서 목격하며, 함께 간 공연장에서는 모든 소리가 허구인 공연을 보게 된다. “Silencio! No hay banda!” 분명 밴드와 악기가 없는데 음악이 나오고, 가수는 쓰러졌는데 노래가 나온다. 리타는 베티와 함께 공연장에서 극적인 경험을 하며 모든 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베티는 사라져 있고, 리타가 푸른 열쇠로 푸른 상자를 열며 1부가 끝난다. 1부의 주인공은 리타다. 물론 베티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1부는 분명 리타가 사고를 당하며 시작하고 리타가 상자를 열며 끝난다. 1부, 즉 꿈의 주체는 리타인 것이다. 다이앤의 꿈에서 그녀는 리타, 즉 카밀라가 된다. 다이앤은 꿈에서 카밀라가 되어 그녀와의 사랑, 배우로서의 다이앤의 정체성, 아담을 향한 소소한 복수 등 모든 욕망을 이룬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어떤 이는 1부가 현실이고 2부가 꿈이다, 또 어떤 이는 1부와 2부 모두 꿈이다, 등등 서로 아예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1부가 꿈이고 2부가 현실이라는 구조가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1부에서는 환상적이고, 개연성이 무너져 있으며, 도무지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해석이 어려운 장면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에 반해 2부에서는 비교적 그런 연출이 적거나 혹은 아예 없다고까지 바라볼 수 있다. 또한 1부에서 감독이 이미 “이것은 꿈입니다" 하고 힌트를 줬다고 생각한다. 가게 시퀀스가 바로 그것이다. 한 남자는 자신이 악몽을 꾸었고, 그 꿈속의 정체불명의 남자가 현실에선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가게에 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 정체불명의 남자는 등장하고 악몽을 꾼 남자는 쓰러진다. 마치 감독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힌트를 주는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구조 또한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 상,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현실이 꿈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그런 와중에 영화는 1부와 2부의 길이를 정직하게 1:1로 나누지 않았다. 2시간 30분가량의 영화에서 1부가 무려 2시간, 2부가 나머지 30분 정도에 불과한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만약 2시간 동안의 현실을 먼저 보여주고 고작 30분 동안 꿈을 보여줬다고 해보자. 이런 형식이라면 영화에서 30분가량의 “꿈"은 그 힘을 잃고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사실상 없어도 되는 부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혹은 둘 다 꿈이라면 영화 전체 러닝타임에서 1부와 2부의 비중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설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2시간 동안, 즉 ‘다른 영화의 평균적인 러닝타임’만큼 보여주다가, 추가 30분을 통해 사실 앞의 내용은 2부의 반전 세계이자 꿈이었다는 것을 드러낼 때 이 영화가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며 이는 ‘내가 받아들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100만 명이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봤다면, 세상에는 100만 개의 서로 다른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존재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할리우드다. 물론 이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배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LA에 온 여자, 사랑과 고통이 만든 욕망, 욕망의 비극적 실현, 영화계의 이면 등 영화는 ‘할리우드’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정말 훌륭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렇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정말로 아름답다. 가끔 그런 영화들이 있다. 재관람한 것이 아님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서 영화가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이 좋아지는 영화들. 내겐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런 영화였다. 본 직후에는 ‘물론 훌륭한 영화긴 하지만 21세기 최고의 영화라고 할 정도인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며칠 후엔, 영화의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들과 이미지들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다가 결국에는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내게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일깨워주는 이상한 힘이 있다. 영화계의 거대한 별을 기리며 이만 마치겠다.멋있는막국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