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큐어 (1997) - 구로사와 기요시
멋있는막국수
2026-03-21 01:30
24
0

큐어(cure)는 ‘치유’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화 내내 잔인한 살인의 현장밖에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을 치유한다는 뜻일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에 ‘진짜 나’, 그리고 ‘해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이런 시선 끝에는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있다. 얼마나 섬찟한가. <큐어>는 정말이지 ‘섬찟한’ 공포영화다. 싸구려 점프 스케어로 관객을 놀래키기만 할 뿐인 편의적인 다른 공포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사실 점프 스케어 없이 분위기만으로 압도하는 공포 영화는 <큐어>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의 많은 영화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이런 단순한 이유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큐어>는 왜 걸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구로사와 기요시를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올려두었을까?

영화는 주인공(타카베)의 아내(후미에)가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푸른 수염>이라는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왕이 한 남자에게 찾아와 그의 딸을 자신의 아내로 줄 수 없겠냐고 청한다. 왕의 유일한 흠은 푸른 수염이 났다는 것으로, 그 외에는 어떤 나쁜 점도 없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왕과 결혼한 딸이 왕을 죽여버린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들려준 이 이야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분위기를 한 번에 보여준다. 딸은 왕을 왜 죽였을까? 이 이야기를 듣는 관객은 그 이유에 의문을 갖게 되지만 영화는 딸이 왕을 죽였다는 사실만 알려준 채 숏을 전환시킨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분위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 등, 아리송하게 느껴지는 <푸른 수염> 이야기는 영화의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실 <푸른 수염>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다. 왕은 남자의 딸, 즉 자신의 아내에게 다른 방문은 모두 열어도 좋으나, 지하실의 한 작은 방만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아내는 이를 어겨 지하실의 방문을 열게 되고, 지하실에서 왕의 전처들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를 알아챈 왕은 아내를 죽이려 하지만 아내는 그녀의 오빠들과 왕을 무찌르고 탈출하게 된다. 지하실의 작은 문을 열고 살인자가 된 아내. 마치 자신의 내면에 꽁꽁 숨겨놨던 본성을 마주하고 살인자가 되는 영화의 내용을 축약한 것만 같다.

주인공의 아내가 <푸른 수염>의 뒷이야기를 들려준 방식처럼, 영화는 살인을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다룬다. 단적인 예시로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살인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영화는 <푸른 수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후 뜬금없이 첫 살인의 가해자가 될 인물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저 길을 걷다가, 마치 최면의 트리거처럼 느껴지는 파이프에서 물이 새는 모습, 불빛이 깜빡이는 모습을 보여주고선, 바로 살해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인물이나 배경, 살해 동기 등, 그 어떤 것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경쾌한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당연한 일상인 듯 행해지는 이 첫 살인 사건은 영화가 살인 사건을 다루는 태도를 집약한다.

살인 사건의 원흉(마미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은 압도적이다. 그의 첫 등장은 한 남자(하나오카), 곧 자신도 모르게 살인자가 될 한 남자의 시선을 빌린다. 하나오카의 눈에 비친 마미야는 텅 비어있는 해변에 가만히 서, 두리번거리다가, 하나오카를 바라보며, 이내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화면에는 모래사장과 마미야뿐이고, 그는 무방비하게 서 있다. 그럼에도 관객은 어딘가 싸함을 느끼곤 바짝 긴장하게 된다. 텅 빈 화면처럼 보이지만 마미야의 존재감이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더 숨 막힌다. 마미야는 하나오카에게 걸어와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며칠인지 등을 묻는다. 하지만 그가 질문에 대답을 해줌에도 마미야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결국 자신이 누군지 아냐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카메라는 이를 롱 쇼트로 찍음으로써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마미야와 하나오카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긴장하게 된다. 이전에 의문의 살인 사건을 보여준 만큼, 이런 독특한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충분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마미야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하다. 그는 하나오카에게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본 것을 계속해서 물어본다. 하나오카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을 못 하는 상태이니 말이다. 자신의 아내를 봤냐는 하나오카의 질문에 마미야는 “난 아무것도 생각 안 나. 생각하는 건 당신이야.”라고 말하며 라이터를 켠다. 하나오카는 라이터의 불을 응시하고, 이어서 화면은 담뱃불을 비춘다. 마미야가 하나오카에게 부인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이야기한 후 장면은 전환된다. 기본적인 질문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라이터를 켜며 이야기를 유도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최면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마미야는 최면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최면에 걸린 하나오카는 아내를 죽인 살인자가 된다.

“생각하는 건 당신이야.”라는 마미야의 말은 최면에 걸린 이들의 손에 묻은 피를 더욱이 강조하는 듯 보인다. 마치 너에게 살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 있고, 나는 너의 본능을 일깨워주는 것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마미야는 텅 비어 있는 인물이다. 속이 텅 비어 있는 마미야는 남모를 본능과 비밀들로 속이 꽉 차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이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최면이 시작되는 순간 두 인물은 역전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며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이던 마미야와 그를 도와주던 상대방은, 어느새 관계가 역전되며 분위기를 장악하는 마미야와 그에게 최면이 걸린 상대방이 된다. 이때 상대방이 되려 텅 비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마미야와 타카베의 독대에서 정점을 찍는다. 타카베는 마미야가 수감되어 있는 독방을 찾아간다. 타카베는 마미야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으려 그의 질문을 회피하지만 이내 자신의 진심을 토해내 버린다. 대화를 시작했을 때, 마미야는 작은 방 안에, 타카베는 방 밖에 있었다. 하지만 타카베가 진심을 토해낼 때, 마미야는 방 밖에, 타카베는 작은 방 안에 있게 된다.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을 표현한 연출이 압권이다. 타카베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마미야에게 이제 너에 대해 말하라며 라이터를 켜게 되는데, 곧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라이터의 불을 꺼버린다. 분위기를 다시 장악해 보려 마미야를 흉내 내지만 라이터의 불이 꺼지고, 오히려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최면의 트리거로 삼으려는 마미야의 모습에 관객들은 타카베의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타카베와 그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사쿠마)가 메스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쿠마가 들고 있는 럭비공은 마미야를 뜻하는 것 같기도, 우리들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이성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지, 이성을 지우고 본성대로 움직인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어버린다고 말하는 듯하다. 살인마저도 말이다.

마미야는 최면요법을 배운 사람이다. 마미야가 최면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다는 뜻일까? 영화는 마미야의 장소에서 케이지 안에 갇힌 동물들을 마치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듯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본능의 구속과 해방에 대한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큐어>라는 제목의 모순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마미야가 승리하는 영화다. 비록 마미야의 최후는 허무했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마미야의 죽음이 무색하게 분위기를 반전시켜 버린다. 마미야가 죽고 난 후 후미에로 보이는 시체의 모습이 등장한다. 잔인한 시체의 모습이 지나간 후 레스토랑에서 차분하게 식사를 마친 타카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타카베가 결국 마미야의 최면에 걸려 후미에를 죽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 굉장히 섬뜩하다. 이어서 칼을 챙기는 레스토랑 직원의 모습이 나오자마자 컷이 전환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라스트씬이 될 것만 같다.

물과 불의 이미지도 흥미롭다. 영화는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등장하고 최면의 트리거로서 불 또한 등장한다. 마미야의 첫 등장은 해안에서 이루어진다. 파이프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타카베가 켜놓은 라이터의 불을 끄기도 한다. 병원에 간 마미야는 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 이를 넘어뜨려 바닥에 물을 흘린다. 타카베가 마미야를 죽인 후 들어간 방의 바닥에도 물이 흥건하다. 물은 마치 인간의 내면을 감싸는 이성과도 같다. 그렇기에 타카베는 자신이 텅 비었다고 이야기하며 물컵을 넘어뜨려 물을 비운다. 파이프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은 살인자가 될 마미야의 피해자들의 이성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역전된 관계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타카베가 라이터를 켰지만 이내 물이 떨어져 라이터를 끄는 것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타카베가 마미야를 죽이고 물이 흥건한 방에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은 마치 타카베가 결국 마미야에게 패배했다는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물과 대비되는 이미지가 바로 불의 이미지인데, 물로 상징되는 인간의 내면을 지우고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의 불을 켜는 마미야의 행동은 상대방을 이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진짜 자신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이런저런 해설들을 차치하더라도, <큐어>는 장르영화로서도 훌륭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살인 사건들의 근원이 밝혀지는 과정이라던가, 마미야가 다른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장면 등,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관객들을 놔주지 않는다. 또, 타카베가 최면에 걸려 후미에가 자살한 것으로 착각하는 장면이나, 후미에의 병세가 악화돼 빈 세탁기를 계속 돌리고 저녁으로 생고기를 준비해 놓은 장면, 사쿠마가 마미야를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 등, 개인적으로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타카베가 자고 있는 후미에를 찾아가 칼을 집어 들자마자 컷이 전환되는 씬에서는 기어코 타카베가 후미에를 죽였나 싶기도 했다. 더군다나 컷이 전환된 이후 타카베와 후미에가 버스를 타고 어딘가(병원)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버스 창밖으로는 구름밖에 보이지 않기에 순간 저승인가 착각하기도 했다.

<큐어>라는 영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은 결국 우리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미야의 피해자이자, 살인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정보나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큐어>는 마미야의 희생자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냈다. 우리도 언젠가 마미야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공포를 심어주는, 걸작으로 불릴 이유가 충분한 영화이다. 어쩌면 그게 “치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https://unfilmd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