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벌집의 정령 (1973) - 빅토르 에리세
멋있는막국수
2026-03-20 01:52
151
0

<벌집의 정령>은 스페인의 감독 빅토르 에리세의 첫 장편 영화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과작으로 유명하지만 한 편 한 편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로 손꼽히며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들 중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1940년,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삼으며, 스페인 내전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상영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하는데, <남쪽>에서도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던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아예 영화감독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던가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대한 빅토르 에리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내레이터는 영화를 시작하며 이 영화를 보면 충격을 받거나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얘기해 준다. 하지만 이는 마치 <벌집의 정령> 속 <프랑켄슈타인>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 <벌집의 정령>을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스페인 내전 직후의 상황을 아이의 시각으로 다룬 이야기인 만큼 끔찍한 현실이 보여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벌집의 정령>은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생을 느낄 힘을 잃어버렸다며, 바깥 소식은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어머니 테레사의 편지는 독재에 대한 비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아버지 페르난도의 입을 빌린 벌집과 벌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벌집은 독재 정권의 사회, 벌은 사람들이다. 벌들은 윙윙대며 다른 벌들을 선동하고 격노에 싸여 있다. 벌떼의 움직임은 쉴 새 없고 무자비하며, 이를 누군가가 지켜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려버린다. 주인공의 가정집 창문에 수놓아진 육각형 무늬와 이를 비추는 노란 햇빛은 당시 사람들의 삶 속, 가장 가깝고도 깊은 곳에 벌집과도 같은 독재 정권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나와 이사벨이 수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수업에서는 인체 모형에 신체 부위를 붙이는 활동을 하는데 이때 눈이 강조되며 “보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는 마치 정령을 보고, 소통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아이의 시각을 빌리기에 더 참혹하다. 내전 이후의 상황을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였다면 그저 흔한 정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전개함으로써, 순수한 아이의 귀엽고 천진한 모습과 대비된 현실이 더욱 참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관한 예술이다.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해당 장면은 정령을 향한 아이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당시 시대 상황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비판하며 영화의 역할을 일깨워주는 듯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후 이사벨과 아나는 평원의 외딴집을 찾아간다. 아나는 이사벨이 돌아간 후 다시 한번 홀로 찾아가는데, 집 안을 잠깐 들어갔다 나온 아나는 자신의 발보다 훨씬 큰 발자국을 발견한다. 주변을 둘러본 아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한다. “정령”이라는 존재에 한 발자국 다가간 셈이다. 그것이 진짜 정령이든 아니든, 아나는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후에 이사벨은 외딴집 근처에서 아나 혼자 무언가를 보며 손짓하는 것을 몰래 지켜본다. 이렇게 아나는 계속해서 정령과 한 발자국씩 점점 가까워졌다.

아나와 이사벨은 아버지와 함께 버섯을 따러 나갔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독버섯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아나가 발견한 독버섯은 향이 좋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험성을 재차 강조하며 버섯을 발로 짓누른다. 독버섯은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다. 위협적이고, 배척당한다. 프랑코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독재 정권에게는 독버섯, 혹은 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독버섯처럼 짓이겨졌고 괴물처럼 배척당했다.

이사벨 품에 안긴 고양이가 무언가를 보고 경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이사벨은 고양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고양이가 할퀴어 난 피를 자신의 입술에 바르며 거울을 보는 이사벨의 행위는 이사벨이 고양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과 함께 맞물려 마치 그녀가 아이의 시선을 잃은 것처럼, 즉 정령을 못 보게 된 것처럼 보인다. 아나에게 자신이 괴물을 본 적 있다고 이야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사벨은 본래 정령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아버렸든, 단지 나이가 들어 성숙해졌든 어느샌가 정령을 못 보게 된 것이다.

해당 장면 직후, 이사벨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것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사벨이 정말 쓰러진 건지, 아니면 아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감춤으로써 관객에게 상상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나는 이때 이사벨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장면 이후에도 이사벨은 영화에 등장하며 아나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과는 소통하지 않는 점, 아나는 이사벨에게 대답하거나 말을 걸지 않는 점을 보아, 이사벨이 비로소 정령이 되었고, 아나는 그런 이사벨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이사벨이 기침을 하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무시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아나만을 바라본다. 후반부에 도망친 아나가 발견된 후 의사가 테레사에게 하는 말 또한 이사벨의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며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사벨의 침대 위에는 이불이나 베개 등 침구류가 없어져있다.

이사벨과 아이들은 불 위를 뛰어넘는 위험한 장난을 하며 아나는 이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배경음악으로는 어두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불 위를 뛰어넘는 장난처럼 위태위태한 시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함축한 듯한 장면이다.

아나는 다시 한번 외딴집을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내전의 패자인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아나가 계속해서 찾던 괴물, 정령이다. 여태까지는 정령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던 외딴집에서 아나가 드디어 마주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시 내전의 패자는 정령, 괴물, 독버섯으로 상징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나온 테레사의 편지와 아나가 발견한 테레사의 예전 사진 앨범 등을 미루어 보아 테레사는 내전으로 인해 갈라진 옛 애인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와 마주친 이 남자가 바로 테레사의 옛 애인으로 보이며, 테레사의 사진 앨범 속 남자와 비슷한 외관, 테레사가 연주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시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결국 이 남자는 총살을 당하게 되고, 테레사는 이후 공허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편지를 태워버린다. 내전이 사랑을 갈라놓고, 비극적인 결말로 몰고 간 암울한 시대상을 환기한다.

남자의 피를 보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아나의 꿈에서는 독버섯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나온다. 아나는 독버섯을 만지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괴물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곧이어 등장한 괴물과 접촉마저 하게 된다. 사회가 배척하는 독버섯과 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접촉할 수 있는 아이의 순수함이 드러난다. 사실 독버섯과 괴물은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한다. 이런 사회를, 빅토르 에리세는 아이의 행동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 전술했듯 이사벨의 침구류와 이사벨이 사라져 있는 밤이다. 아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벌집무늬의 창을 열고 이사벨이 자신에게 정령에 관해 해 줬던 말을 되새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기차 소리를 배경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한밤중에 기차 소리라니, 의아할 법하다. 기차는 앞서 아나가 만났던 한 남자를 데려다준 장치이다. 아나가 앞으로도 정령들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순수한 아이의 시각을 지닌, 정령을 볼 수 있으며 보고도 아무 편견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아나가 벌집무늬의 창문을 연 장면은 빅토르 에리세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함축적으로 훌륭하게 나타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에 조용하다. 누런빛을 띠는 화면은 벌집, 즉 독재 정권이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해당 영화를 두 번 봤지만 두 번 모두 보자마자 든 생각은 ‘영화를 참 아름답게 찍었다’이다. 아름답게 찍은 영화는 시선을 확 잡아끌며 별 것 아닌 사건에도 몰입하게 해 준다. 세상에 훌륭한 영화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더 애착이 가는 영화들은 특히나 아름답게, 혹은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모종의 이유로 생겨버린 특정 영화에 대한 애착이 그 영화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벌집의 정령>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정말 두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판타지를 가미해 시대를 풍자한 아름다운 잔혹동화. 만약 당신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재밌게 봤다면 <벌집의 정령>도 정말 소중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너무 귀엽다! 귀여운 아역들만으로도 <벌집의 정령>을 사랑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남몰래 내비치며 리뷰를 끝마치겠다.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