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무셰트(1967) - 로베르 브레송
영화는 어떤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가슴 위에 돌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그녀는 죽음 자체보다 남겨질 이의 삶에 대한 걱정이 더 커보인다.
이후 배경이 숲으로 바뀐다. 한 사냥꾼이 올가미를 설치한다.이에 걸려들어 몸부림을 치는 꿩의 모습과, 수풀에서 이를 몰래 지켜보는 산림감시원 마티유의 시선이 교차되어 제시된다. 어째 그는 꿩의 죽음을 기다리는 건지, 바로 풀어주지 않는다.

기다려도 죽지 않고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꿩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제야 다가서서 풀어준다.
이 오프닝의 사냥장면은 이후 반복된다. 태풍이 부는날 아르센에게 붙잡힌 무셰트의 상황과 같다. 다만 이번에는 지켜보는 시선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아르센은 수풀에 숨어 비를 피하던 그녀에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고백하며 말을 맞추자며 협박한다.그가 잠시 자신의 범행 현장으로 돌아가고 이내 숲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아르센의 총은 그곳에 있다. 그럼 누구의 총소리인가? 돌아온 그는 아마도 죽지 않은 마티유의 총소리이며 그가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 하며, 그녀와 함께 오두막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분명 앞선 장면에서 마티유와 아르센은 다투다 화해를 했다. 그럼에도 정보를 완전하게 주어주지 않는 브레송 영화의 특성상 관객은 일단 아르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오두막에 도착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헤어지려다, 이내 아르센은 패닉에 빠진다. 온갖 불안에 떨며 그녀가 발설할까 문을 막기까지 한다. 그는 그러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그녀는 그를 부축한다. 그가 깨어나자 그녀는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며 약속하며 그에게 노래를 불러준다.(실제로 지킨다.)
'콜럼버스는 희망을 가지라며...' 학교에서 완창하지 못했던 노래를 이번엔 끝까지 불러낸다. 희망을 믿기로 한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아르센에게 부여한 삶에 대한 희망은 그녀를 다시 위협한다. 아르센은 취한 상태로 이내 그녀를 협박하고 강간한다.

이 장면 외에도, 무셰트에게 가해지는 관심은 항상 폭력의 형태를 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서, 일상에서는 남성에게서 폭력을 당한다. 학교에선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비웃으며 배척한다. 선생님은 피아노 앞에서 대놓고 망신을 주기도 한다. 하교길에 남자 아이들은 그녀에게 바지를 내리며 성희롱을 한다. 아버지는 수시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린다.
이미지로서 이 폭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놀이동산에서 범퍼카를 타던 그녀에게 어떤 남성은 관심을 보인다. 그 관심의 정도는 차를 박는 강도에 비례한다. 점차 거세게 부딪히며 재밌어한다.

놀이기구 운행이 끝나고 그 남자를 찾아가지만, 어째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사람들에겐 그녀가 길거리에서 구애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일테다.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녀의 뺨을 때리며 그에게서 그녀를 떼어놓는다.
왜 무셰트는 이 폭력들에 대항하지 않는가?라고 했을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이들이 가하는 시선의 폭력에 그녀는 흙을 던짐으로 대항하며, 범퍼카 남자에게는 더 세게 갖다박기도 한다. 처음엔 아르센의 강간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아버지에게 '제기랄'이라며 욕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도들이 무력하게 작용하는 것 뿐이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무력하며, 전반적으로는 시선의 폭력에 눌려버린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그녀에게 점차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선의 폭력은 그녀가 아르센에게서 빠져나오자 더욱 심해진다. 마티유의 집에 찾아간 그녀는 전날 밤 아르센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지만, 그들의 추궁과 시선에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 전날 밤 강간하는 아르센을 기꺼이 끌어안는듯 한 그녀의 모습처럼, 어쩌면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외적으로는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한 카페 사장은 이내 손님과 쑥덕거리다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며, 창녀라고 비난한다.

두 경우 모두 그녀는 직접 해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아마도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 브레송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겠다.)
집으로 돌아가다 어떤 노파가 그녀를 부른다. 그녀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급하며 수의를 쥐어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죽음을 이해한다고 한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낫다는 말 같기도, 낙인이 찍힌 무셰트에게 죽음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 같아보인다.이제보니 이 수의는 무셰트 자신의 것 같다. 당혹스러움에 그녀는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
지금까지의 일을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삶으로의 탈출에 구원은 없는 듯하다. 올가미에서 탈출한 꿩에게, 오두막에서 탈출한 무셰트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유나 구원이 아닌 고통스러운 삶의 연명이다.
희망은 없다.( 그렇다고 절망은 아니다, 무셰트는 절망하기보다 조용하게 감내한다.)
어머니에게 밤 사이에 태풍이 왔다면서, 태풍 맞겠죠? 라며 말을 흐리던 무셰트 역시 이 삶의 고난이 끝나긴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이후 엔딩에서 토끼를 사냥하는 여러 사냥꾼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총소리는 더 이상 특정되지 않는다. 위협은 사방에 도사린다. 그녀는 총을 맞아 발버둥치는 토끼를 본다. 오프닝의 마티유와 달리, 그녀는 토끼를 죽음을 그저 바라본다.
무셰트를 남기고 자살을 한 어머니처럼, 무셰트 역시 돌보아야 할 아기를 남기고 죽음을 택한다.( 사실 아기가 남자 아이라는 측면에서, 무셰트의 어머니보다는 남겨진 이에게 대물림 될 고난에 대한 걱정이 덜 할 것이다.)
이후 수의를 몸에 지고 언덕에서 굴러 강에서 자살을 결심한다.그러다 트랙터에서 누군가 오는 걸 보고 멈춘다. 약간은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지만 그는 그냥 지나친다. 아무리 죽음을 결심했다 한들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무셰트는 강에 다시 몸을 던진다.카메라는 물 속에 익사한 무셰트의 장면을 몇 번이고 되감는다. 수면이 조금 흔들릴 뿐, 변화는 없다.
![]()
그렇다면 무셰트는 성녀인가?
잔잔한 수면을 비추는 엔딩에 흐르는 Monteverdi의 Magnificant(마리아의 찬가)는 순교자 무셰트를 위한 것인가?
브레송이 아무리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 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다. 죽음은 구원이 아닌 죽음일 뿐, 그 순간일 뿐이다.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카메라는 더더욱 포착하지 못한다.어떤 가치 판단이나 지성이 관여된 설명 대신, 존재하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 원칙인 브레송의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어느 장면에도 무셰트에게 구원의 빛이 들지 않는 이 영화처럼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무셰트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배제하고 개인에 주목하기보단 현상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 점이 더 설득력을 높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