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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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 (1997) - 구로사와 기요시큐어(cure)는 ‘치유’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화 내내 잔인한 살인의 현장밖에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을 치유한다는 뜻일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에 ‘진짜 나’, 그리고 ‘해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이런 시선 끝에는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있다. 얼마나 섬찟한가. <큐어>는 정말이지 ‘섬찟한’ 공포영화다. 싸구려 점프 스케어로 관객을 놀래키기만 할 뿐인 편의적인 다른 공포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사실 점프 스케어 없이 분위기만으로 압도하는 공포 영화는 <큐어>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의 많은 영화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이런 단순한 이유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큐어>는 왜 걸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구로사와 기요시를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올려두었을까? 영화는 주인공(타카베)의 아내(후미에)가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푸른 수염>이라는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왕이 한 남자에게 찾아와 그의 딸을 자신의 아내로 줄 수 없겠냐고 청한다. 왕의 유일한 흠은 푸른 수염이 났다는 것으로, 그 외에는 어떤 나쁜 점도 없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왕과 결혼한 딸이 왕을 죽여버린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들려준 이 이야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분위기를 한 번에 보여준다. 딸은 왕을 왜 죽였을까? 이 이야기를 듣는 관객은 그 이유에 의문을 갖게 되지만 영화는 딸이 왕을 죽였다는 사실만 알려준 채 숏을 전환시킨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분위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 등, 아리송하게 느껴지는 <푸른 수염> 이야기는 영화의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실 <푸른 수염>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다. 왕은 남자의 딸, 즉 자신의 아내에게 다른 방문은 모두 열어도 좋으나, 지하실의 한 작은 방만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아내는 이를 어겨 지하실의 방문을 열게 되고, 지하실에서 왕의 전처들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를 알아챈 왕은 아내를 죽이려 하지만 아내는 그녀의 오빠들과 왕을 무찌르고 탈출하게 된다. 지하실의 작은 문을 열고 살인자가 된 아내. 마치 자신의 내면에 꽁꽁 숨겨놨던 본성을 마주하고 살인자가 되는 영화의 내용을 축약한 것만 같다. 주인공의 아내가 <푸른 수염>의 뒷이야기를 들려준 방식처럼, 영화는 살인을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다룬다. 단적인 예시로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살인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영화는 <푸른 수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후 뜬금없이 첫 살인의 가해자가 될 인물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저 길을 걷다가, 마치 최면의 트리거처럼 느껴지는 파이프에서 물이 새는 모습, 불빛이 깜빡이는 모습을 보여주고선, 바로 살해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인물이나 배경, 살해 동기 등, 그 어떤 것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경쾌한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당연한 일상인 듯 행해지는 이 첫 살인 사건은 영화가 살인 사건을 다루는 태도를 집약한다. 살인 사건의 원흉(마미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은 압도적이다. 그의 첫 등장은 한 남자(하나오카), 곧 자신도 모르게 살인자가 될 한 남자의 시선을 빌린다. 하나오카의 눈에 비친 마미야는 텅 비어있는 해변에 가만히 서, 두리번거리다가, 하나오카를 바라보며, 이내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화면에는 모래사장과 마미야뿐이고, 그는 무방비하게 서 있다. 그럼에도 관객은 어딘가 싸함을 느끼곤 바짝 긴장하게 된다. 텅 빈 화면처럼 보이지만 마미야의 존재감이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더 숨 막힌다. 마미야는 하나오카에게 걸어와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며칠인지 등을 묻는다. 하지만 그가 질문에 대답을 해줌에도 마미야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결국 자신이 누군지 아냐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카메라는 이를 롱 쇼트로 찍음으로써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마미야와 하나오카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긴장하게 된다. 이전에 의문의 살인 사건을 보여준 만큼, 이런 독특한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충분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마미야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하다. 그는 하나오카에게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본 것을 계속해서 물어본다. 하나오카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을 못 하는 상태이니 말이다. 자신의 아내를 봤냐는 하나오카의 질문에 마미야는 “난 아무것도 생각 안 나. 생각하는 건 당신이야.”라고 말하며 라이터를 켠다. 하나오카는 라이터의 불을 응시하고, 이어서 화면은 담뱃불을 비춘다. 마미야가 하나오카에게 부인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이야기한 후 장면은 전환된다. 기본적인 질문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라이터를 켜며 이야기를 유도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최면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마미야는 최면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최면에 걸린 하나오카는 아내를 죽인 살인자가 된다. “생각하는 건 당신이야.”라는 마미야의 말은 최면에 걸린 이들의 손에 묻은 피를 더욱이 강조하는 듯 보인다. 마치 너에게 살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 있고, 나는 너의 본능을 일깨워주는 것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마미야는 텅 비어 있는 인물이다. 속이 텅 비어 있는 마미야는 남모를 본능과 비밀들로 속이 꽉 차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이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최면이 시작되는 순간 두 인물은 역전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며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이던 마미야와 그를 도와주던 상대방은, 어느새 관계가 역전되며 분위기를 장악하는 마미야와 그에게 최면이 걸린 상대방이 된다. 이때 상대방이 되려 텅 비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마미야와 타카베의 독대에서 정점을 찍는다. 타카베는 마미야가 수감되어 있는 독방을 찾아간다. 타카베는 마미야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으려 그의 질문을 회피하지만 이내 자신의 진심을 토해내 버린다. 대화를 시작했을 때, 마미야는 작은 방 안에, 타카베는 방 밖에 있었다. 하지만 타카베가 진심을 토해낼 때, 마미야는 방 밖에, 타카베는 작은 방 안에 있게 된다.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을 표현한 연출이 압권이다. 타카베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마미야에게 이제 너에 대해 말하라며 라이터를 켜게 되는데, 곧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라이터의 불을 꺼버린다. 분위기를 다시 장악해 보려 마미야를 흉내 내지만 라이터의 불이 꺼지고, 오히려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최면의 트리거로 삼으려는 마미야의 모습에 관객들은 타카베의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타카베와 그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사쿠마)가 메스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쿠마가 들고 있는 럭비공은 마미야를 뜻하는 것 같기도, 우리들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이성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지, 이성을 지우고 본성대로 움직인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어버린다고 말하는 듯하다. 살인마저도 말이다. 마미야는 최면요법을 배운 사람이다. 마미야가 최면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다는 뜻일까? 영화는 마미야의 장소에서 케이지 안에 갇힌 동물들을 마치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듯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본능의 구속과 해방에 대한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큐어>라는 제목의 모순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마미야가 승리하는 영화다. 비록 마미야의 최후는 허무했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마미야의 죽음이 무색하게 분위기를 반전시켜 버린다. 마미야가 죽고 난 후 후미에로 보이는 시체의 모습이 등장한다. 잔인한 시체의 모습이 지나간 후 레스토랑에서 차분하게 식사를 마친 타카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타카베가 결국 마미야의 최면에 걸려 후미에를 죽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 굉장히 섬뜩하다. 이어서 칼을 챙기는 레스토랑 직원의 모습이 나오자마자 컷이 전환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라스트씬이 될 것만 같다. 물과 불의 이미지도 흥미롭다. 영화는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등장하고 최면의 트리거로서 불 또한 등장한다. 마미야의 첫 등장은 해안에서 이루어진다. 파이프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타카베가 켜놓은 라이터의 불을 끄기도 한다. 병원에 간 마미야는 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 이를 넘어뜨려 바닥에 물을 흘린다. 타카베가 마미야를 죽인 후 들어간 방의 바닥에도 물이 흥건하다. 물은 마치 인간의 내면을 감싸는 이성과도 같다. 그렇기에 타카베는 자신이 텅 비었다고 이야기하며 물컵을 넘어뜨려 물을 비운다. 파이프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은 살인자가 될 마미야의 피해자들의 이성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역전된 관계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타카베가 라이터를 켰지만 이내 물이 떨어져 라이터를 끄는 것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타카베가 마미야를 죽이고 물이 흥건한 방에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은 마치 타카베가 결국 마미야에게 패배했다는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물과 대비되는 이미지가 바로 불의 이미지인데, 물로 상징되는 인간의 내면을 지우고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의 불을 켜는 마미야의 행동은 상대방을 이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진짜 자신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이런저런 해설들을 차치하더라도, <큐어>는 장르영화로서도 훌륭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살인 사건들의 근원이 밝혀지는 과정이라던가, 마미야가 다른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장면 등,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관객들을 놔주지 않는다. 또, 타카베가 최면에 걸려 후미에가 자살한 것으로 착각하는 장면이나, 후미에의 병세가 악화돼 빈 세탁기를 계속 돌리고 저녁으로 생고기를 준비해 놓은 장면, 사쿠마가 마미야를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 등, 개인적으로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타카베가 자고 있는 후미에를 찾아가 칼을 집어 들자마자 컷이 전환되는 씬에서는 기어코 타카베가 후미에를 죽였나 싶기도 했다. 더군다나 컷이 전환된 이후 타카베와 후미에가 버스를 타고 어딘가(병원)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버스 창밖으로는 구름밖에 보이지 않기에 순간 저승인가 착각하기도 했다. <큐어>라는 영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은 결국 우리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미야의 피해자이자, 살인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정보나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큐어>는 마미야의 희생자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냈다. 우리도 언젠가 마미야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공포를 심어주는, 걸작으로 불릴 이유가 충분한 영화이다. 어쩌면 그게 “치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멋있는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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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어린 시절 (1962)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련을 대표하는 거장 영화감독이다. 그는 생전 총 7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냈는데, 7편 모두 하나하나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현재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면 가히 신이 내린 재능의 감독이 아닌가 싶다.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럽게 그의 작품들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뚜렷하다. 삶과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는 예술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첫 장편 영화부터 비범함을 내보인다. 그의 필모그래피 속, 다소 이질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그의 첫 장편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은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단편 소설 <이반>을 영화로 각색하였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분명 전쟁 영화다. 하지만 다른 전쟁 영화들과는 다르다. 다른 전쟁 영화들이 치열한 전시 상황 속 긴장감에 집중하여 극을 끌고 나간다면 <이반의 어린 시절>은 고작 정찰 임무 사이의 휴식기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반은 기껏해야 12살쯤 되는 앳된 소년이다. 가족이라곤 모두 잃은. 그런 소년이 이 영화에서 보이는 태도는 다른 전쟁 영화들에서 보이는 “아이”의 모습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12살쯤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전쟁에 대해 경험이 있을뿐더러 나름의 조예도 눈에 띈다. 그가 다른 군인들과 상호작용 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군인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캐릭터성에서 느껴지는 비극은 중간중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이반의 아이 같은 면모에서 더욱 부각된다. 이를테면 의미 없는 열매 개수나 세고 있다던지, 군사학교로 보내려는 그랴즈노프 대령에게 화가 나 도망을 친다던지, 비상사태에 HQ로 불려 간 카타소니치가 인사를 안 하고 갔다고 삐진다던지 말이다. 소년 이반이 전시 상황에서 겪었을 압박감은 그가 홀로 상상 속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에서 훌륭하게 드러난다. 나머지 인물들이 후에 있을 정찰 임무를 위해 보트를 구하러 나섰을 때, 이반은 홀로 남겨진다. 이때 이반은 마치 어린아이가 역할 놀이하듯 홀로 상상 속 임무를 수행한다. 환청마저 들으며 몰입하던 이반은 이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코트를 보며 적군을 대하듯 울분을 토해낸다. 이반은 전쟁으로 가족 모두를 잃었다. 이에 이반은 전쟁 속 자신의 역할에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며 복수를 꿈꾼다. 이반이 빈 코트를 마주한 채 울분을 토해내다가 이내 감정적으로 힘겨워하며 주저앉는 니콜라이 부를랴예프의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한껏 몰입하게 해 준다. 실제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저서 <시간의 각인>에서 밝히길, 니콜라이 부를랴예프를 알게 된 것이 <이반의 어린 시절> 제작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지었으며, 니콜라이 부를랴예프를 포함한 몇몇 인물들이 성공을 보장해주었다고 한다. 군사학교에 가기 싫어 이반이 도망치다가 다시 붙잡혀 오는 일련의 시퀀스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반은 대령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결국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한 집에 도착한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이반과 그를 둘러싸며 그를 향해 날카롭게 뻗어있는 목재들이다. 전쟁으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버린 폐허의 목재들이 이반을 향해 날카롭게 뻗어 있는 이 장면은 전쟁 속 한 소년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의 위험성과 그가 느끼는 압박감, 외로움 등을 함축적으로, 그리고 훌륭하게 표현한다. 이반은 폐허에서 나치군들에게 아내를 잃고 미쳐버린 한 노인을 만나는데, 그는 말한다. 굴뚝과 난로는 결코 타버리지 않는다고. 사실 이 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반이, 혹은 영화를 보는 당신이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을 주는 장면인지, 비극만을 몰고 오는 전쟁의 끝나지 않을 듯한 참혹함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세계를 시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관객은 감독 혹은 작가가 제시하는 결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관객은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적인 인식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자유로운 사유를 경유하여, 결론에 다다른다. 그것이 관객과 예술가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유일한 길이라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말한다. 이반의 꿈에서 이반과 그의 엄마가 우물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이반에게 깊은 우물은 낮에도 그 수면에서 별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이반은 깊은 우물이다. 전쟁으로 가족 모두를 잃은 비극적인 이반의 상황 속에서도, 우물 속의 별은 언제나 반짝일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듯한 엄마의 말은 곱씹어볼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콜린 대위의 말처럼, 이반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원작의 제목인 <이반>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이반의 어린 시절>로 제목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이반의 기구한 인생의 비극성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보통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라고 말한다면, 그 인물의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난 채 과거를 돌아보는 듯한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반의 최후를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최후에 이르러 보란 듯 이반을 죽인다. 사실 원작이 이반을 죽였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원작의 이런 면이 본인을 놀라게 했다고 고백했다. 보통의 다른 소설이라면 인물이 죽은 후 후일담을 들려주며 위안을 주지만, <이반>은 죽음이 최종적인 단계로서 모든 것을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진성은 비극성을 강조하고 전쟁이 자연에 반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통감하게 해 준다는 것이 그가 소설 <이반>을 읽으며 놀란 점 중 하나였다.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 또한 마찬가지다. 최후에 이반이 죽었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 후, 이반의 마지막 꿈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반의 마지막 꿈에서는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놀다가 여동생과 함께 웃으며 해변을 뛰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무엇보다 강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맑게 뛰노는 아이 이반은 영화 전반에 걸쳐서 보인 군인 이반과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비극성이 한 층 더 강조된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소 이질적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이렇다. 느린 템포의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타르코프스키 특유의 스타일이 정립되기 전의 작품이라 빠른 전개와 템포가 돋보인다. 또 삶과 진리, 세계와 본질에 더욱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이반이라는 한 인물의 삶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쉬우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을 알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입문작으로 많이들 추천해 주는 작품이다. 거장은 초기작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멋있는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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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 (2000) - 에드워드 양<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의 거장 감독 에드워드 양의 유작이다. 에드워드 양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하나 그리고 둘>은 같은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함께 아시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17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몰입하며 봤던 기억이 난다. 화면이나 서사, 연기, 캐릭터 등 영화 자체가 가진 힘 덕분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 덕분이었다.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밖에 보지 못한다. 같은 사건을 마주하면서도 반응이 제각각 다르고,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선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을 유추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뒤통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 <하나 그리고 둘>에서도 이 점을 재치 있게 짚어낸다. 제목은 하나를 뜻하는 “一” 2개를 위아래로 써 둘을 뜻하는 “二”로 만들었다. “二”가 관점에 따라서는 두 개의 “一”이 되는 것이다. 또, “一”은 우리 개개인의 삶을 의미하는 듯도 싶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관점이 있고 저마다의 삶이 있다. 에드워드 양은 이를 한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병치하여 보여주는 다중 플롯을 택함으로써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한 공통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 “삶들의 병치”는 사이사이에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NJ와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게 된 오타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NJ에게 매일매일이 처음인데 사람들은 왜 처음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NJ의 아내 민민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즉 쓰러진 할머니에게 가족들이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얘기를 해주자고 양양에게 말한다. 하지만 곧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곤 매일 똑같은 얘기만 하게 된다며 하소연한다. 여기서 또 훌륭한 각본의 힘이 드러나는데, 민민은 이에 지쳐 잠깐 절에 들어가게 된다. NJ는 민민과는 잠시 떨어졌지만 일본 출장에서 자신이 오래전 사귄 셰리라는 여자를 마주한다. 사실 이는 아주 개인적인 비밀인 것이다. 우린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비밀을 품고 살아간다. NJ의 경우는 셰리를 만난 것이고, 팅팅의 경우엔 자신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고, 그 쓰레기를 할머니가 버리려고 한 바람에 쓰러지게 되셨다는 죄책감일 것이다. 양양의 경우에는 학급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것, 민민의 남동생 이다의 경우에는 파산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개개인의 삶 속엔 비밀이 존재하고, 이런 비밀들 역시 우리가 반쪽짜리 진실밖에 보지 못하는 것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서 에드워드 양은 영화의 기능을 포착한다. 바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진실, 그들의 뒤통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양양은 자신의 아버지 NJ에게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냐며, 나머지 반쪽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NJ는 그런 아들에게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답을 한다. 그 후로 양양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뒤통수를 찍고 다닌다. 나는 “양양”이라는 이름에서 감독 본인, 즉 에드워드 양을 떠올렸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은 양양에 본인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양양이 카메라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나머지 반쪽의 진실을 찍듯, 에드워드 양도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며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패티의 삼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가 생겨난 후로 인간의 수명은 3배 늘어났다.” 영화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준다. 패티 삼촌의 말을 빌려, 구름과 나무가 없다면 아름다움도 없다. 수많은 영화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수많은 간접 경험을 하며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화의 촬영과 편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아직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굉장히 정적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최소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구도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을 텐데, 여기에서 에드워드 양은 카메라를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도 영화 속에 참여시켰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카메라의 움직임이 최소화되어 있다. 따라서 프레임 밖, 즉 외화면에서 이뤄지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다. 또, 카메라의 구도를 활용해 일부러 인물들을 화면에서 감추기도 하고, 카메라를 유리창 밖에 둬 유리창을 통해 그 너머를 보게 만들거나, 유리창에 비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관객을 인물과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어 반쪽짜리 진실을 보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관객을 속이고 반전을 주는 그런 류의 영화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직접적으로 보여줘도 되는 장면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가볍게 감춤으로써, 관객들 또한 절대적인 진실에 전능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살짝 장애물을 뒀다는 것이다. 편집 또한 돋보이는데,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이전 장면에서의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는 L컷이나, 다음 장면에서 나올 대화가 이전 장면의 화면을 바탕으로 하여 먼저 들리는 J컷을 자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이다의 아내 샤오얀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초음파로 검사해 보는 장면이 있다. 초음파 검사 화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음 장면, 즉 NJ와 오타가 미팅하는 장면의 대화가 먼저 등장한다. 보이스오버 된 오타의 말은 이렇다. ‘이제 하나의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살아있는 독립체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곧 태어날 태아를 보며 하는 이야기인 듯하다. 곧이어, 컴퓨터 게임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우리는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의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에드워드 양이 관객을 가볍게 속이는 장면은 이따금씩 등장한다. 상술했다시피, 관객을 ‘반쪽짜리 진실만 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영화에 참여시키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또 보이스오버를 적극 활용한 장면이 바로 NJ와 셰리, 팅팅과 패티가 만나는 장면이다. NJ와 셰리는 함께 일본을 걸으며 추억을 회상한다. 이때 보이스오버로 그들의 목소리만 나오고 화면은 팅팅과 패티를 비춘다. 여기서 우리는 NJ와 셰리의 과거 모습이 현재 팅팅과 패티의 모습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이란 이렇다. 같은 모습이어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모습이어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팅팅은 삶이 불공평하다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토로하고, 민민은 삶이 생각보다 복잡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정답은 없다. 그저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진 것뿐이니 말이다.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새로운 생명이 생기는 결혼식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생명이 꺼지는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성을 통해 이 영화가 사람의 인생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다른 이에게 감춰왔던 비밀들을 밝히기도 한다. NJ는 민민에게 자신이 셰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동안 할머니에게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던 양양도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양양이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나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크게 다가왔다. 양양은 훗날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아마 에드워드 양이 영화를 찍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영화는 그저 한 가족 구성원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차근차근, 느린 템포로 전시하듯. 우리는 그저 감독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선 제각각 다른 감상을 내놓는다. 아무래도 우린 저마다의 삶을 겪어온 “一”이니까. <하나 그리고 둘>의 전체적인 뼈대는 명확하지만 사이사이의 디테일은 모호하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마저도 관객들을 영화에 참여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바가 이렇다 보니 <하나 그리고 둘>이 유작으로서의 의미도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는 이유, 또,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한 에드워드 양의 대답이 담긴 걸작이다.멋있는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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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이야기 (1953) - 오즈 야스지로<동경 이야기>는 1953년에 개봉한 일본의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이다. 이 불세출의 걸작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지 일일이 나열하기엔 손가락만 아플 것이다. 사실 어떤 영화가 대중들에게, 평론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가 뭐 얼마나 중요하겠나. 본인에게 좋은 영화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동경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도 한 번쯤 꼭 리뷰해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빠져 산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2022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마음껏 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본 영화 중 탑 5를 꼽으라면 주저 않고 고를 정도로 개인적으로 정말 사랑하는 영화이다. <동경 이야기>는 가족 간의 관계가 삭막해져 버린 현대의 모습을 그려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주는 영화이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오노미치시에 사는 한 노부부가 오랜만에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도쿄로 떠나는 내용이다. 영화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극단적으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보여주는데, 이를 위해 사용된 기법이 그 유명한 다다미 쇼트이다. 다다미 쇼트란, 카메라를 다다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높이 정도로 맞추고 롱테이크로 촬영하는 기법이다. 다다미 쇼트에서는 관찰자의 주관이 포함될 수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배제된다. 대단히 정적이고 객관적인 화면이 나열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다다미 쇼트의 특성상, 아무래도 화면에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프레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극단적으로 정적인 화면임에도 스크린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준 것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한 미장센이다. 감독은 프레임 안에 여러 사물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배경과 설정을 드러냄과 동시에 정보를 제시하고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오즈 야스지로는 사물과 인물의 배치와 카메라의 구도에 대한 고민을 통해 풍부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미장센을 자아냈다. 덕분에 영화는 당시 일본의 풍경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동경 이야기>는 어느 장면을 캡처해도 “정말 잘 찍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신이 <동경 이야기>를 보게 된다면 화면을 장식해 놓은 여러 요소들을 관찰하며 당시 도쿄의 내음을 한껏 즐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대비하여 내용은 상당히 잔인하다. 상술했듯, 가족 간의 관계가 삭막해진 현대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이다. 가족의 형태가 핵가족으로 변해가던 당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오즈 야스지로는 평범한 가족을 선택했다.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지만 중간중간 스며들어 있는 노부부에 대한 가족의 홀대는 가족에게 신경을 잘 써주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영화의 눈을 빌려 마치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이 가족에게 벌어진 일들을 보고, 노부부를 홀대하는 가족들을 욕한다. 하지만 영화 속 가족의 태도가 나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순간 내 안에서 거대한 종이 댕-하고 울리듯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다. 자식들은 부모님을 챙겨주는 척하지만 그들을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부모임에도 일이 우선이거나, 짐처럼 여겨 다른 이에게 떠민다거나, 아예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을 속셈으로 온천 여행을 시켜주지만 그마저도 노인이 가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럼에도 노부부가 자식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면 괜스레 눈이 핑하고 돌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부부를 가장 잘 보살펴준 건 그들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 노리코였다. 노리코는 남편과 8년 전에 사별했다. 노부부, 즉 슈키치와 토미는 그런 노리코를 불쌍히 여겨 재혼을 권유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자신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물론 노리코는 사별한 남편 쇼지를 완전히 잊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리코가 말했듯 어느 정도 그를 떠나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리코는 왜 재혼 권유에 대해 강경히 반대를 한 것일까?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노리코가 노부부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남편의 존재는 없어졌지만, 노리코가 이미 그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냈지만, 노리코는 노부부를 자신의 부모처럼 여기며 한 가족이 되었다. 이렇듯 가족이란 존재는 단순히 핏줄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아니다. 가족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며, 생각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에 가족 간의 사이가 다른 관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끈끈해질 수 있는 것이다. 부모를 홀대했던 자식들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곧 유물을 챙기기에 급급하며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자식들은 매정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찾아가야 한다.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는가. 일상으로 돌아간 척해도 자식들의 가슴은 찢어지고 그들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를 대단히 상징적인 쇼트의 연속으로 보여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여주는 일련의 쇼트들은 영화가 시작할 때 나왔던 쇼트들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찍은 화면들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온 장면들과 달리, 노동자나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배나 기차도 없다. 그저 텅 비어있는 장소만 보여줄 뿐이다. 같은 일상 같아 보여도 모든 것이 활기를 잃고 죽은 듯 조용한 것이다. 이 영화의 장점으로 연기와 대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자식 역할의 배우들은 가장 평범한 우리 현대인들이 가족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매우 훌륭하게 보여줬고 노부부 역할의 배우들은 그런 자식들이어도 마냥 고맙고, 실망스러워도 이해하려 노력하며,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부모의 모습을 굉장히 탁월하게 보여줬다. 훌륭한 캐릭터성의 구축과 대단한 연기 덕분에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은 배가됐다. 특히 슈키치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취한 채 시게의 집에 들어온 장면에서는 진짜 술에 취해 찍었나 싶을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술에 취해 힘이 없는 슈키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측은함마저 느껴졌다. 또, 토미가 죽은 후 멍하니 넋이 나가 있는 슈키치의 모습도 정말 일품이다. 이 장면들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수도 없이 많다. 할머니 토미가 말을 걸자 이사무가 후다닥 도망가는 장면, 이사무와 토미가 풀밭에서 노는 장면, 온천에서 다음 날을 맞아 바다 앞에 앉아서 슈키치와 토미가 대화하는 장면, 토미와 노리코가 대화하는 장면, 슈키치가 토미를 간호하는 장면, 토미가 죽은 후 노리코가 슈키치를 찾으러 가는 장면 등등. 어쩌면 모든 장면들일 것이다. 그중 토미가 죽은 후 노리코가 슈키치에게 케이조가 왔다며 알리는 장면은 정말 짧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터의 그림으로 삽입될 만큼 중요한 장면이다. 덧붙여,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정말 아름다운 새벽이었다고 얘기하는 할아버지의 대사는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분명 가족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와 할아버지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장면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핏줄이라 하더라도 가장 소중한 가족이 될 수 있고, 자식이라 하더라도 부모를 홀대할 수 있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가족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보살펴주고, 챙겨주고, 늘 편이 되어줘야 하고 사랑하며 안아줘야 한다. 영화에 나오듯, 무덤에 이불 덮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영화는 관조적이고 담담한 태도로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며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를 보며 감탄하기도 했고, 웃기도 했으며, 측은해하기도, 반성하기도 참 많이 했다. 첫 관람 때도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서 영화가 점점 커져 더 좋아졌으며, 두 번째 관람 직전에는 빨리 보고 싶어서 며칠을 설렜을 정도이다. 잔잔하고 조용하며 극적인 스펙터클은 없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주는 울림이 컸다. 앞으로 점점 나이가 들어 영화에 나오는 자식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또 노부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아마 <동경 이야기>는 나와 함께 나이 들며, 평생을 사랑할 영화일 것이다.멋있는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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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 유어 아이즈 (2023) - 빅토르 에리세<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31년 만에 돌아온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이다. 오랜 공백기가 있던 만큼, 촬영 방식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변한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빅토르 에리세의 미감은 필름, 디지털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사실 개인적으로 디지털은 흉내 내지 못하는, 필름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질감이 살아있는 필름이, 깔끔하게 찍힌 디지털보다는 아네모이아를 훨씬 더 잘 자극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천재 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나를 어김없이 전율하게 만들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에 대한 매력적인 찬사인 동시에 빅토르 에리세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 또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 미겔은 배우 실종 사건 후 오랜 공백기를 겪는다. 31년 만에 돌아온 빅토르 에리세와 겹쳐 보인다. 빅토르 에리세를 미겔에 대입해 보면 빅토르 에리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영화는 늙었고, 미겔도, 빅토르 에리세도 늙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물러 있는 과거로부터 세월이 지난 것이다. 영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맥스의 가게는 위기에 처하게 됐다. 맥스가 고고학이라고 표현한 필름 영화 산업은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낡아버렸다. 미겔은 감독 일을 그만둔 후 글쓰기도 해보고 사업도 해보며 방황했다. 미겔과 맥스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과거에 머물러 방황하던 것은 미겔과 맥스뿐만이 아니었다. 맥스는 훌리오가 가장 큰 문제점인 “늙는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훌리오는 젊었을 적 많은 여자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늙어가며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됐고 그게 훌리오를 힘들게 했을 것이라고 맥스는 말한다. 이는 마치 한때 명작들을 만들어내며 관심을 받았던 빅토르 에리세가 공백기 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빅토르 에리세는 거장 감독으로서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마지막 단독 장편 <햇빛 속의 모과나무> 이후로 다른 감독들과 함께 만든 여러 작품들이나 그의 단편들은 큰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훌리오 또한 빅토르 에리세의 분신 같기도 하다. 빅토르 에리세의 분신인 미겔이 또 다른 분신인 훌리오를 찾는 영화인 셈이다. 어쩌면 에리세는 영화를 만들며 자신이 누구였는지, 잃어버렸던 불꽃이 무엇이었는지 되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고 어둡다. 또, 미겔에게 그림자가 드리우는 장면이 많다. 이런 연출들은 미겔을 고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의 주변인들이 영화에 등장하긴 하지만 모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이이며, 실종 사건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일 뿐이다. 미겔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캠핑카의 벽면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푸른 저녁>이 걸려 있는데, 이 또한 고독을 상징한다. 미겔과 맥스는 어떻게 늙는지 아는 것, 그것은 두려움과 희망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늙어가며 감정에 무뎌지고 고독해진다. 아마 빅토르 에리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겔이 원래 살던 곳으로 잠깐 돌아가 이웃들과 한밤중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아름답다 못해 보는 나까지 행복해지는 장면이었다. 이어서는 미겔이 글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예술가 마이클 와신스키는 왜 어느 날 자신의 걸작이 영화가 아니라 자기 삶이 될 것이라고 결정했을까?” 마이클은 미겔이 살던 곳에서 이웃들이 미겔을 부르던 이름이다. 미겔에 빅토르 에리세를 대입하듯, 마이클에 빅토르 에리세를 대입한다면, 이 문장은 본인의 삶에 대한 에리세의 예찬인 동시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단순한 영화일 뿐 아니라 에리세 본인의 삶을 담은 영화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정말 대담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훌리오의 딸 아나와 미겔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대화에서 아나는 아버지와 관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하는데, 아나가 꽤 오랫동안 클로즈업된다. 클로즈업은 인물의 감정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연기가 어색하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 역의 아나 토렌트는 보란 듯이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아버지에 대한 쓸쓸함, 슬픔, 그럼에도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하려 하는 연기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또, 여담이지만 <벌집의 정령> 이후 50년이 지났음에도 아나 토렌트의 아역 시절 얼굴이 은근히 드러나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벌집의 정령>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했던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나는 훌리오를 대면했을 때 본인이 아나라고 훌리오에게 말해준다. “Soy Ana.” <벌집의 정령>을 본 사람이라면 해당 대목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벌집의 정령>에서 아나가 정령을 부를 때 자신을 소개하는 대사인 “Soy Ana.”가 50년이 지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기억을 잃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대사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벌집의 정령>으로 데뷔한 아나 토렌트가 50년 만에 빅토르 에리세와 만나 가슴이 쿵쾅쿵쾅하고 뛰게 만든 장면이었다. 프레임 속에 갇힌 훌리오의 삶 또한 훌륭한 연출을 통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미겔이 훌리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자신의 상상을 룰라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훌리오는 골대 프레임의 형상을 한 네모난 목재 프레임 안에 들어간다. 미겔은 내레이션으로 “그는 오로지 공과 상대 선수만을 보기 위한 눈을 가지고 있었지. 맞은편에서 슛을 날리려는 선수. 그의 운명의 시작과 끝.”이라고 말한다. 훌리오가 들어가 있는 목재 프레임의 모습은 골대 프레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프레임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실종 사건으로서 tv프로그램에서 다뤄지며 그의 운명이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극중극과 극의 유사성도 돋보인다. 극중극 <작별의 시선>에서는 레비가 프랭크에게 자신의 딸 주디스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극에서는 미겔이 배우 훌리오를 찾는다. 극중극과 극 모두 누군가를 찾기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해,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상대방을 찾으며 끝난다. 훌리오가 과연 기억을 되찾았을지에 관해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극중극과의 유사성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주디스가 기억을 되찾은 것과 마찬가지로 훌리오 역시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나를 말 그대로 전율하게 만들었다. 극중극 <작별의 시선>의 마지막 장면, 주디스와 프랭크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보통 영화에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제4의 벽을 깨는 것이다. 극중극에서 주디스와 프랭크는 제4의 벽을 깨고 극중극을 보는 훌리오를 바라본다. 주디스가 기억을 찾은 것처럼 훌리오도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어서 미겔은 훌리오를, 훌리오는 극중극의 화면을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응시한다. 훌리오가 겪은 영화의 마법 같은 기적을 영화를 보는 우리도 겪을 수 있도록. 훌리오가 이내 눈을 감으며 화면이 천천히 눈을 감는 것처럼 페이드아웃 되고 필름이 다 감기는 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야말로 영화를 향한 찬사다. 과작의 거장 빅토르 에리세가 이토록 전율하는 영화를 향한 헌정시를 들고 31년 만에 돌아온 것은 수많은 영화 팬들에게 매우 소중한 선물이었다. 2시간 49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과, 느리고 잔잔한 분위기에 누군가는 지루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영화의 기적을 믿는다면, 영화가 죽어도 자신 안의 불꽃을 지켜낼 자라면, 분명히 사랑할 영화라고 생각한다.멋있는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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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 (1973) - 빅토르 에리세<벌집의 정령>은 스페인의 감독 빅토르 에리세의 첫 장편 영화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과작으로 유명하지만 한 편 한 편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로 손꼽히며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들 중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1940년,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삼으며, 스페인 내전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상영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하는데, <남쪽>에서도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던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아예 영화감독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던가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대한 빅토르 에리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내레이터는 영화를 시작하며 이 영화를 보면 충격을 받거나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얘기해 준다. 하지만 이는 마치 <벌집의 정령> 속 <프랑켄슈타인>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 <벌집의 정령>을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스페인 내전 직후의 상황을 아이의 시각으로 다룬 이야기인 만큼 끔찍한 현실이 보여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벌집의 정령>은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생을 느낄 힘을 잃어버렸다며, 바깥 소식은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어머니 테레사의 편지는 독재에 대한 비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아버지 페르난도의 입을 빌린 벌집과 벌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벌집은 독재 정권의 사회, 벌은 사람들이다. 벌들은 윙윙대며 다른 벌들을 선동하고 격노에 싸여 있다. 벌떼의 움직임은 쉴 새 없고 무자비하며, 이를 누군가가 지켜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려버린다. 주인공의 가정집 창문에 수놓아진 육각형 무늬와 이를 비추는 노란 햇빛은 당시 사람들의 삶 속, 가장 가깝고도 깊은 곳에 벌집과도 같은 독재 정권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나와 이사벨이 수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수업에서는 인체 모형에 신체 부위를 붙이는 활동을 하는데 이때 눈이 강조되며 “보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는 마치 정령을 보고, 소통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아이의 시각을 빌리기에 더 참혹하다. 내전 이후의 상황을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였다면 그저 흔한 정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전개함으로써, 순수한 아이의 귀엽고 천진한 모습과 대비된 현실이 더욱 참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관한 예술이다.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해당 장면은 정령을 향한 아이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당시 시대 상황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비판하며 영화의 역할을 일깨워주는 듯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후 이사벨과 아나는 평원의 외딴집을 찾아간다. 아나는 이사벨이 돌아간 후 다시 한번 홀로 찾아가는데, 집 안을 잠깐 들어갔다 나온 아나는 자신의 발보다 훨씬 큰 발자국을 발견한다. 주변을 둘러본 아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한다. “정령”이라는 존재에 한 발자국 다가간 셈이다. 그것이 진짜 정령이든 아니든, 아나는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후에 이사벨은 외딴집 근처에서 아나 혼자 무언가를 보며 손짓하는 것을 몰래 지켜본다. 이렇게 아나는 계속해서 정령과 한 발자국씩 점점 가까워졌다. 아나와 이사벨은 아버지와 함께 버섯을 따러 나갔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독버섯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아나가 발견한 독버섯은 향이 좋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험성을 재차 강조하며 버섯을 발로 짓누른다. 독버섯은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다. 위협적이고, 배척당한다. 프랑코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독재 정권에게는 독버섯, 혹은 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독버섯처럼 짓이겨졌고 괴물처럼 배척당했다. 이사벨 품에 안긴 고양이가 무언가를 보고 경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이사벨은 고양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고양이가 할퀴어 난 피를 자신의 입술에 바르며 거울을 보는 이사벨의 행위는 이사벨이 고양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과 함께 맞물려 마치 그녀가 아이의 시선을 잃은 것처럼, 즉 정령을 못 보게 된 것처럼 보인다. 아나에게 자신이 괴물을 본 적 있다고 이야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사벨은 본래 정령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아버렸든, 단지 나이가 들어 성숙해졌든 어느샌가 정령을 못 보게 된 것이다. 해당 장면 직후, 이사벨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것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사벨이 정말 쓰러진 건지, 아니면 아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감춤으로써 관객에게 상상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나는 이때 이사벨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장면 이후에도 이사벨은 영화에 등장하며 아나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과는 소통하지 않는 점, 아나는 이사벨에게 대답하거나 말을 걸지 않는 점을 보아, 이사벨이 비로소 정령이 되었고, 아나는 그런 이사벨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이사벨이 기침을 하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무시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아나만을 바라본다. 후반부에 도망친 아나가 발견된 후 의사가 테레사에게 하는 말 또한 이사벨의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며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사벨의 침대 위에는 이불이나 베개 등 침구류가 없어져있다. 이사벨과 아이들은 불 위를 뛰어넘는 위험한 장난을 하며 아나는 이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배경음악으로는 어두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불 위를 뛰어넘는 장난처럼 위태위태한 시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함축한 듯한 장면이다. 아나는 다시 한번 외딴집을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내전의 패자인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아나가 계속해서 찾던 괴물, 정령이다. 여태까지는 정령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던 외딴집에서 아나가 드디어 마주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시 내전의 패자는 정령, 괴물, 독버섯으로 상징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나온 테레사의 편지와 아나가 발견한 테레사의 예전 사진 앨범 등을 미루어 보아 테레사는 내전으로 인해 갈라진 옛 애인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와 마주친 이 남자가 바로 테레사의 옛 애인으로 보이며, 테레사의 사진 앨범 속 남자와 비슷한 외관, 테레사가 연주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시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결국 이 남자는 총살을 당하게 되고, 테레사는 이후 공허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편지를 태워버린다. 내전이 사랑을 갈라놓고, 비극적인 결말로 몰고 간 암울한 시대상을 환기한다. 남자의 피를 보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아나의 꿈에서는 독버섯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나온다. 아나는 독버섯을 만지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괴물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곧이어 등장한 괴물과 접촉마저 하게 된다. 사회가 배척하는 독버섯과 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접촉할 수 있는 아이의 순수함이 드러난다. 사실 독버섯과 괴물은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한다. 이런 사회를, 빅토르 에리세는 아이의 행동을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 전술했듯 이사벨의 침구류와 이사벨이 사라져 있는 밤이다. 아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벌집무늬의 창을 열고 이사벨이 자신에게 정령에 관해 해 줬던 말을 되새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기차 소리를 배경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한밤중에 기차 소리라니, 의아할 법하다. 기차는 앞서 아나가 만났던 한 남자를 데려다준 장치이다. 아나가 앞으로도 정령들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순수한 아이의 시각을 지닌, 정령을 볼 수 있으며 보고도 아무 편견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아나가 벌집무늬의 창문을 연 장면은 빅토르 에리세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함축적으로 훌륭하게 나타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에 조용하다. 누런빛을 띠는 화면은 벌집, 즉 독재 정권이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해당 영화를 두 번 봤지만 두 번 모두 보자마자 든 생각은 ‘영화를 참 아름답게 찍었다’이다. 아름답게 찍은 영화는 시선을 확 잡아끌며 별 것 아닌 사건에도 몰입하게 해 준다. 세상에 훌륭한 영화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더 애착이 가는 영화들은 특히나 아름답게, 혹은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모종의 이유로 생겨버린 특정 영화에 대한 애착이 그 영화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벌집의 정령>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정말 두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판타지를 가미해 시대를 풍자한 아름다운 잔혹동화. 만약 당신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재밌게 봤다면 <벌집의 정령>도 정말 소중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너무 귀엽다! 귀여운 아역들만으로도 <벌집의 정령>을 사랑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남몰래 내비치며 리뷰를 끝마치겠다.멋있는막국수

